정진영
산처럼
2024년 4월 25일
집 근처에 있는 농장은 지주인 양반 자신이 노비를 동원해서 직접 경영했다. 이런 경영 형태를 가작(家作)이라 했다. 먼 곳에 있는 농장은 작개제(作介制)라는 방식으로 경영했다. 작개제란 농장의 토지를 작개지와 사경지로 나누어 작개지는 주인이, 사경지는 노비가 수확물을 차지하는 경영 형태를 말한다. 물론 농사를 짓는 것은 노비다. 노비가 주인의 땅을 경작해주는 대신에 사경지를 받아서 먹고사는 것이다. 머슴에게 1년 단위로 주는 품삯을 ‘새경’이라 한 것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벼를 재배하는 방법은 물은 채운 논에 발아한 볍씨를 파종하는 직파법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양법은 못자리에서 키운 모를 뽑아 논에 옮겨 싣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중국의 강남 지방에서 성행하던 농법이었는데 경상도 북부 지역의 양반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도입됐다. 이양법은 직파법에 비해 김매는 횟수뿐만 아니라 노동력도 크게 줄여주었다. 무엇보다 이양법의 가장 큰 매력은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벼를 수확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또한 벼 재배가 끝난 후에는 보리농사를 지음으로써 1년에 두 번 추수할 수 있는 기쁨도 누릴 수 있었다.
경상도 북부 지역은 주곡이 보리였다. 양반도 대부분 보리로 연명했다. 흔히 경상도 ‘보리 문둥이’라고 표현한다. 이 말은 다름 아닌 보리를 주식으로 사는 학동, 즉 ‘보리 문동’에서 나온 것이다. 경상도 선비가 서울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였는데 기껏 보리밥이나 먹고 촌티도 벗지 못한 경상도의 젊은 선비가 그 모양새와 달리 학문 수준이 높고 예의범절이 깍듯해 서울의 관료를 깜짝 놀라게 한 것에서 붙여진 말이 보리 문동(文童)이다.
보리죽은 보리가 토실토실한 쌀이 되기 전 덜 여문 보리 꼬투리를 따서 방아에 찧으면 하얀 즙이 나오는데 그 즙으로 쑤는 것이다. 며칠만 더 견디면 잘 익은 보리를 수확할 수 있는데 익지 않은 보리 꼬투리를 따야 하는 그 심정은 생자식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양반의 주업은 농업이었다. 비록 관직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평생직장이나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양반은 대체로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양반이라고 모두 그리고 늘 이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몇 세대가 지나도록 벼슬은커녕 생원 진사 합격자도 배출하지 못하는 집안이 허다했다. 흉년이 심한 해에는 제법 토지를 가진 지주라 하더라도 안정된 삶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조선 후기에 대책 없는 양반이 많았다. 그래도 양반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농민도 장꾼도 장인도 될 수 없었다. 배운 것도 없거니와 그 순간 양반 지위를 잃는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저 선비로서 본분을 지켜 독서 하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노비세전법은 일천즉천(一賤卽賤), 곧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천민이면 그 자식은 천한 신분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종천법(從賤法)이다. 이를 따르면 노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반면 국가의 공민인 양인의 수는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국가 재정과 균역 자원이 부족해져서 남아 있는 양인에게 그 부담이 가중되니 결국은 나라가 파탄 나게 된다. 조선에서는 양인 확보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연산군의 폭정 이후 양인은 권리에 대한 배려보다는 의무를 더 많이 요구받게 되었다. 그 결과 양인이 노비에 비해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됐다. 이제 굳이 허울 뿐인 양인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양인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천민이 되기 시작했다. 또는 양인 스스로 유력 향촌 사족가에 의탁해 노비가 되기도 했다.
사족이 노비 확보를 위해 양천교혼을 주도했다. 자기 소유의 노비를 양인과 혼인시켜 그들의 자녀를 노비로 만드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16~17세기 노비의 비율을 전체 인구 가운데 적어도 40~50퍼센트는 됐을 것으로 추산한다. 여기에 양반과 중인의 인구를 감안하면 말 그대로 천민이 국역을 담당하는 양인보다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 단성현에는 조선 후기의 호적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1678년에 62퍼센트, 18세기 전반에는 40~50퍼센트, 18세기 중엽에는 30~40퍼센트, 18세기 후반에는 20~30퍼센트, 1820년대에는 20퍼센트 미만, 1860년대에는 20~30퍼센트였다. 이로써 16~17세기에는 노비가 양인보다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토지보다 노비가 더 중요한 재산이었다. 양반은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자 했다. 그 수는 가문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16~17세기 양반 명문가의 노비는 많은 경우 500~600명에 달했다.
양반집의 가사 노동이나 가작지 경영에 동원되는 양역노비는 솔거노비라고도 했는데, 주인집의 행랑채 등에 거주하면서 생활하는 노비는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은 주인집 주변이나 마을의 개별 가옥에서 독자적인 경영 주체로 살았다. 이들의 수는 시대에 따라 또는 주인집의 규모에 따라 달랐지만 16~17세기에는 20~30명 많으면 40명 정도였다. 주인집에서 기거하지 않는 노비는 출퇴근하듯 주인집을 드나들면서 이런저런 일을 했다. 주인은 이들의 노동력을 제공받는 대가로 매달 양식을 보조해주거나 경작할 토지를 주어 생계를 보장해주었다.
노비는 소유주에 대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으로 복종과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 제공에 대한 일정한 대가를 받았다. 노비 주인과 노비의 관계가 사족과 농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상호 보험적인 혹은 상호 의존적 호혜 관계였다. 양반가의 노비가 수백 명에 달하던 시절에 대부분의 노비는 상전의 집과는 무관하게 혹은 인긍 여러 고을이나 아주 먼 다른 고을에 살기도 했다. 이들을 외거노비라고 불렀다. 이들은 가족 단위로 남의 자신의 토지나 남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었다. 대신 주인집에 몸값으로 남자 종은 삼베 두 필, 여자 종은 한 필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매년 이렇게 의무를 다ᆞ는 노비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콩이나 참깨, 꿩, 닭 등을 조금 바치거나 아예 바치지 않기도 했다. 농업도 발달하고 상업도 발달함에 따라 노비는 주인의 보호를 받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 장수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같은 시기의 서양인보다도 높았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족보에는 혼인하기 이전에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조선시대에도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다산다사(多産多死)의 시기였다. 많이 낳았지만 성인이 되기 전에 또 많이 죽었다. 이들은 통계에서 당연히 제외되었다. 호적 역시 10여 세 미만의 아이는 거의 등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10대 인구가 70대보다도 적다. 그뿐 아니라 나이도 믿을 만 하지 않다. 양반 상민 할 것 없이 대부분 나이를 높였기 때문이다. 서너 살은 보통이고 10여 세 이상 높인 경우도 많았다. 상민은 군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반은 벼슬을 받기 위해서였다. 상민도 60세가 되면 군역에서 면제됐고 70세가 넘으면 명예 뿐이기는 하지만 벼슬을 받을 수 있었다.
양반집에는 대부분 딸이 없다. 10세 미만의 아이도 별로 없다. 아이가 없기는 상민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호적이 현실 가족 구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양반이나 상민이나 실제 가족은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역사란 기록을 아주 중요시한다. 그렇다고 그대로 믿기만 하면 스스로 광대가 되고 말 때가 많다.
아들과 딸의 차별이 확고해진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조선 전기, 곧 16세기 중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적어도 가정에서는 딸도 아들 못지않은 지위를 누렸다. 여자가 시집가는 대신에 남자가 장가를 들었고, 딸이 시집살이하는 게 아니라 사위가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에는 딸도 아들과 똑같은 자격으로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았고 조상의 제사에도 참여했다. 이러다가 아들, 그것도 맏아들이 중요하게 부각된 시기는 대체로 16세기를 지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유학의 영향이 컸다. 유학에서는 남자가 하늘이고 기둥이며 세상의 중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