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14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열네 번째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재개발로 밀려난 가난한 도시생활자를 다룬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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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
김윤영
후마니타스
2022년 10월 24일
낙후되었거나 영세한 가게들이 주를 이루던 지역이 ‘뜨는 상권’이 되면서 고급스런 상업시설로 바뀌는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한다. 용어가 뜻하는 대로 지역이 고급화한다는 것인데, 그로 인해 환경은 크게 개선되지만 정작 ‘뜨는 상권’을 만들어낸 가게들은 높아진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문제가 발생한다. ‘뜨는 상권’ 때문에 생긴 이익을 그것을 만들어낸 가게들이 아니라 건물 소유주들이 독점하기 때문이다. 경의선 숲길에서 보는 것처럼 공공자금을 투입해 개발한 지역 또한 그 이익을 땅과 건물을 소유한 사람이 독점하고 그 과정에서 밀려나면서 생계수단을 잃은 영세 상인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아파트 재개발도 마찬가지다. 2010년부터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서울의 아파트가 있는 자리는 누군가 그곳에서 쫓겨났다고 봐도 좋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게 쫓겨난 이들은 점점 더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면서 생존권을 위협받게 된다. 예컨대 상계동 재개발로 밀려난 세입자들은 경기도 포천 양계장 부지로 이주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막상 그곳에 가보니 서울로 오가는 버스가 없어 출퇴근조차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것은 세입자들의 생활근거를 빼앗고 생존권을 박탈하는 일일 뿐 아니라 그들이 감당했던 도시 노동력을 잃는 문제를 일으킨다.
이와 같은 두 경우는 같은 듯 달라 보인다. 가난한 이들의 생활근거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뜨는 상권’에서 밀려난 상인들은 ‘뜨는 상권’을 만드는데 기여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의 분배를 요구할 수 있지만 재개발로 밀려난 세입자들은 그렇게 요구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저자가 서술한 것처럼 세입자들은 생존권을 박탈하지 말라거나 보금자리를 보장하라는 것 이상으로 구체적으로 요구할 수 없었고, 해당 도봉구청에서도 “세입자는 보증금을 돌려받아 나가는 것뿐, 재개발법상 아무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로 일하고 있지만 저자의 부친은 1980년대에 주택공사를 다니며 상계동 아파트 재개발사업에 참여했다. 부친은 저자에게 “쫓겨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표를 던지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결국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고 너를 키웠다. 철거민들이 쫓겨난 곳에서 먹고 살겠다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었지만, 너를 먹여 살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고 했고, 허구한 날 집회만 쫓아다니는 딸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면서도 판교 철거민들의 농성장을 지나면서 “네가 말하는 연대는 저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라고도 했다. 저자는 부친이 그렇게 고백한 연원에는 상계동에서 저항하던 철거민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1980년대 철거민의 저항이 정부의 주택정책을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목동 철거민들의 투쟁 이후 정부는 무허가 주택의 재산권을 인정하고 일부 세입자들에게 보상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연대로 이어져 1990년 동소문동과 돈암동 개발지역 세입자들이 영구임대주택 입주권과 3개월분 주택비를 얻어냈지만 모든 세입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는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마포구청은 2016년 아현역 앞에 늘어서 있던 포장마차를 철거했다.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상인들에게 자진 철거를 종용했고, 장사하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대책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지역사회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철거를 강행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30년 넘게 장사하던 동네에서 돌연 존재를 거부당한다는 것은 마음을 갉아 먹히는 일이다. 손발이 부르트는 노동으로 삶을 지켜온 이들이 그간 공짜로 장사했으면 이제 그만하라는 모욕을 듣는 것은 괴롭힘이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부가 무허가 주택의 재산권을 인정했다는 것이나 30년 넘게 공짜로 장사했다는 말을 모욕으로 느꼈다는 말을 듣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이미 60년 가깝게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나 역시 철거민이었다. 미아리고개 산동네에서 살면서 부친이 근근이 모은 돈으로 빈 땅에 무허가 주택을 지었는데 학교에 다녀와 보니 벽은 다 무너지고 지붕만 남아있었다. 내려앉은 지붕과 겨우 남아있는 벽을 얼기설기 판자로 가리고 거기서 얼마를 더 살면서도 서럽기는 했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허락도 없이 남의 땅에 지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빈곤을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여겼던 그때와 빈곤이 사회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지금이 같을 수는 없다.
그렇기는 해도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난 영세 상인들이 ‘뜨는 상권’을 만들어낸 공헌을 요구하는 것이나 정책으로 이익의 분배를 규정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도시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에 대해 최소한의 복지를 보장하는 것 역시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순종보다는 혼종이 더욱 건강한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만 생각해도 그렇다. 그런 관점에서 저자가 요구한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한 정책 전환’에 대해 적극 공감한다.
저자는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제도의 요구사항이 모순적이라고 지적한다. 복지서비스를 신청하는 절차가 오히려 복지서비스가 필요 없는 사람이나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까다롭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부양 의무자 기준을 폐지하는 일이다. 부양 의무자가 부양을 책임지지 않아서 빈곤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은데 부양 의무자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니 말이다. 저자는 의료급여의 경우 부양 의무 기준이 완화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향후 폐지계획조차 없다고 개탄하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이 문제는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폐지’라는 해결책이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경우다. 저자가 예를 든 국일고시원 화재 사건이 그렇다. 2018년 11월, 수표교 앞에 있던 국일고시원에 화재가 일어나 7명이 죽고 11명이 다쳤다. 켜놓고 잠든 전열기구에서 불이 났는데 소화기도 없고 화재경보도 울리지 않아 순식간에 번진 것이다. 고시원은 공간을 여러 개로 쪼개기 위해 가연성 높은 패널로 벽을 만들고 통로도 좁게 만든다. 저자는 이것을 규제의 문제로 이해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규제를 만들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시설을 개선하면 그 부담은 그대로 이용자에게 돌아가고, 결국 그것마저 감당할 수 없는 이용자들을 쫒아내는 결과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치 고리대금을 막기 위해 이자를 제한하면 정작 신용이 낮은 사람들은 그마저 빌릴 곳이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장애인 이동권이 그렇고 홈리스가 그렇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고, 그러면서도 상식과 이치에 어긋난 요구가 보여서도 그렇다. 괜히 읽었다 싶기도 했다. 저자는 말미에서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막연한 편견을 거두고 한 번쯤은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면 좋겠다. 타인의 실패에 점점 더 가혹해지는 세상에서 자신의 가난을 드러내며 싸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 함께 싸우더라도 어느 순간 자기 몫의 아픔이 찾아오겠지만 이 용기 있는 사람들의 외로운 시간이 견딜 만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 그래서 나도 괜히 읽었나 생각했던 것을 바로 잡았다. 해결할 수 없어도, 해결책을 고민하지 않아도, 그저 이런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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