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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ug 01. 2024

[요약] 양반과 선비 1

정진영

산처럼

2024년 4월 25일


조선시대는 양반의 사회였다. 양반은 국정을 주도하고 세상을 이끌어 나갔다. 양반은 원래 고려시대 문반과 무반, 혹은 동반과 서반을 지칭하던 것에서 유래했다. 이후 그에 속한 사람, 그 후손과 인척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양반은 크게 유학을 기반으로 해서 전현직 관료와 품계를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16세기 이후에는 군역 부담을 지지 않는 특권층으로 존재했다.


조선 초기에는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다가 차츰 양인 가운데 벼슬아치를 양반이라 했는데 이들은 점차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특권을 장악해 양반 신분층으로 성장했다. 양인이지만 이러한 특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평민이 되었다. 17세기에 이르러 양반과 평민 사이에 전문 직종인 법률, 의학, 통역 종사자와 관청의 행정 실무 담당자를 중심으로 한 중인이 분화됨으로서 양반, 중인, 평민, 상민 네 종류의 신분이 형성됐다. 이후 유교적 의식과 체제가 확립되면서 신분 체계가 확고해졌다.


18~19세기 농업이 발달하면서 조선의 신분제는 크게 동요했다. 이에 따라 몰락한 양반도 경제적 부를 축적한 평민이나 천민도 생겼다. 평민과 천민은 돈을 주고 관직과 품계를 사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명첩이니 납속첩이니 하는 것을 남발해서 상당수의 평민과 천민에게 관직과 품계를 주었다.


성씨는 고려시대에 지방의 양인에까지 보급됐다. 그러나 노비를 비롯한 천민에겐 조선시대 중후기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성이 없었다. 17세기 중반의 호적 대장을 보면 성이 없는 사람이 전체의 반 이상이다. 물론 이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을 가진다는 것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거나 벗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84년 갑오개혁과 함께 노비제가 폐지된 이후 우리 모두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인 안동 권씨의 <성화보>에 서문을 쓴 서거정(1420~1488)은 “우리나라에는 원래 족보라는 것이 없어서 거가대족이라도 몇 세대가 지나면 조상 이름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일찍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한 가문도 이러했으니 이들보다 뒤늦은 가문의 경우에는 윗세대 조상 세계가 불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8~19세기에 와서 비로소 족보를 편찬할 수 있었던 가문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도 후대에 편찬되는 족보에서 시조와 윗세대의 세계가 도리어 정연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된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런 경우는 시조와 윗세대 기록이 허위거나 적어도 과정, 왜곡됐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정약용은 상민과 천민이 유명한 가문이지만 후손이 없는 파에 붙어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꾸어 정승의 후예라고 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어서 처벌할 수 없을 정도라고 개탄했다. 정도 대의 어떤 이는 신문고를 쳐서 가짜 족보 단속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렇듯 가짜 족보는 당시 사회에서 아주 폭넓게 퍼져있었다.


양반은 귀양 갈 때 대부분 종이나 자식을 대동했다. 그래도 가는 길이 수월하려면 압송하는 관리에게 상당한 뇌물을 주어야 했다. 양반이나 관리는 대부분 당파 간의 갈등이나 정치적 탄압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래서 길목마다 일가친척이나 친지들이 나와 여비를 부조하거나 술을 대접했다. 특히 죄인이 권세가 출신이면 유배 길목의 고을 수령과 아전이 고을 입구까지 마중 나와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 여행경비와 필요한 물품을 바치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고을 수령과 며칠씩 어울려 놀기도 했다. 물론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죄인이 도착하면 고을 수령은 이들을 감독 관리해야 했다. 별도의 집을 지어 죄인들이 함께 살게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주인집을 정해 그곳에서 거처하게 했다. 권세가 있고 유배지의 수령과 친분이 있으면 연회의 초대되거나 심지어 관아 기생의 시중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들은 가족이나 노비와 함께 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족이 함께 살려면 집을 빌리거나 새로 지어야 했다. 물론 관아에서 돕는 경우도 있고 거주지 주변 논밭을 빌려서 농사를 짓기도 했다. 데리고 간 노비를 부려서 짓기도 했다.


전주에서 들락거리는 장사꾼이 전주로 편지를 전하면 거기서 다시 단성 집으로 보냈다. 집에서는 통영 역말에 부치고 통영에서는 해남 우수영으로 보냈다. 그러면 우수영 하인이 임자도로 전해주었다. 편지는 20여 일 만에 전해졌다. 편지뿐 아니라 친척 또는 아들이 한두 차례 귀양지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퇴계 이황이 49세 되던 해 9월에 풍기 군수 사임장을 감사에게 올린 것을 시작으로 70세 되던 해 9월 마지막 사퇴서를 올리기까지 21년 동안 무려 53회나 됐다. 사퇴의 이유는 병과 늙음, 재능의 부족과 무능, 염치 등을 거론했다. 퇴계는 정치보다는 조용히 학문에 정진하기를 진정으로 원했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 을사사화 때 존경받던 영남의 큰선비들과 함께 넷째 형인 이해가 모함을 받아 갑산으로 유배 가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해는 관직에 있으면서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어려서 이웃에 살던 권신이 권력을 잡고 그의 당파로 끌어들이려 했을 때 응하지 않았다. 퇴계는 이런 형을 가장 의지하고 존경했다. 이 사건은 퇴계에게 큰 충격이었고 더 이상 정치에 뜻을 두지 않게 되었다. 퇴계는 여러 차례 조정에 불려갔지만 온 힘을 다해서 사퇴하기에 급급했다. 명종 또한 바른 소리를 듣거나 그에게 세상을 맡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허수아비로 붙들어두고 그것으로 명분을 삼고자 했을 뿐이다.


조선에서 유생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들이 과거 공부나 하는 단순한 서생이 아니라 정치활동을 하는 정치의 주체였기 때문이다. 유생의 정치활동이 조선 초기부터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 정치구조가 공론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중앙의 정치세력이 광범위한 공론을 토대로 집권 명분을 획득하고자 했기에 유생의 정치 참여가 필요했던 것이다.


민의를 임금에게 전달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글이었다. 글에는 소(疏)ㆍ계(啓)ㆍ차(箚) 등이 있었다. 계(啓)는 일종의 보고서이고 차(箚)는 관료에게만 허용되는 형식이었다. 반면 소(疏)는 모든 사람이 생각이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그 전달 대상이 임금이어서 상소(上疏)라 한 것이다. 이중 특히 유생의 상소를 ‘유소’라고 구분해 재야공론으로 받아들였다.


유소는 공론성 확보라는 면에서 다중의 참여를 전제로 했다. 이에는 복잡한 절차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단 상소가 발의되면 이를 통문으로 각 고을 향교나 서원에 알려 소회(疏會)를 열어야 했다. 상소가 결정되면 일을 책임지고 수행할 소임(疏任)과 우두머리인 소수(疏首)를 선발하고 사무실인 소청을 마련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서울로 가져가는데 여기게 수십 명 또는 백여 명이 넘는 유생이 함께했다. 서울에 도착하면 숙소를 정하고 궐문 앞에 엎드려 승정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승정원에서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승정원에 난입해 난동을 부리거나 10여 차례 이상 계속해서 제출을 시도했다. 상소에 왕의 비답이나 처분이 내려지지 않으면 계속 궐문 밖에서 연좌농성을 했다.


18세기 이후에는 이의 폐단이 심해져서 상소를 올리기 전에 먼저 성균관의 우두머리에게 판단을 받도록 했다. 말하자면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인 셈이다. 이를 근실제도라고 했는데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영남 유생들의 언로가 막혔다. 성균관을 장악한 노론계가 남인의 당론을 표방하는 영남의 유소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남 유생들은 유생 만 명이 참여하는 만인소를 준비해 이를 돌파하려 들었고, 노론의 방해가 있기는 했어도 이 전략이 통용되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 유생 만 명을 동원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지만 실제로 일고여덟 번이나 만인소가 있었고 그것이 모두 영남에서였다.


만인소는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필요로 했다. 준비에서 시작해 상경해 상소를 올리기까지 수십 일이 걸렸다. 특히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그들의 주장이 수용되지 않으면 3, 4차에 걸쳐 수 개월간 지속되기도 했다. 그리고 책임자인 소수 대부분은 유배되기 마련이었다. 상소를 위해서는 백여 명 이상의 소유가 때로는 수 개월간 서울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런저런 사정을 생각한다면 서원 만인소에 든 총경비는 적어도 1만 냥이 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1만 냥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다. 논 330마지기, 쌀 2천 석에 해당한다.


이런 엄청난 경비를 들여가면 올린 만인소는 1792년(정조 16) 사도세자 신원, 1855년(철종 6) 사도세자 추존,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추진한 서원철폐 반대, 1884년(고종 21) 복제 개혁 반대 등이었다.


사림세력은 꾸준히 성장했고 마침내 선조 등극과 더불어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남명 조식은 이 같은 정치적 상황에 큰 영향을 받으면서 사림의 정치적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거나 이끌어가고 있었다. 조식은 행정의 번거로움과 세금의 과중 때문에 나라가 위중한 사태에 이르렀다고 여겼다. 농민이 도망가는 게 본격화된 것은 연산군 이후 훈구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였다.


조식은 상소를 올려 적신 정치를 극렬하게 비판했고, 국가와 사회 기강의 문란과 인사제도의 문제와 국고 탕진을 지적했다. 천한 서리가 국정을 마음대로 한다면서 척신 정치보다 폐단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조식은 현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같은 현실에 필요한 것은 개혁이라고 절절히 역설했다. 하지만 그가 대책이라고 제시한 것은 군주가 학문에 힘써 덕을 밝히려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주가 경을 위주로 하여 선을 밝히고 몸을 정성되게 하면 나라가 저절로 다스려진다고 했다. 이처럼 조식의 개혁론은 구체성과 현실성을 가졌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현실 인식이 정확하고 비판도 엄정했지만 타개 방안은 매우 추상적이었다. 율곡 이이는 조식을 일러 “학문을 함에도 관견이 없고 소장에도 경제에 대한 대책이 없다. 비록 그의 정견이 세상에 시행됐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지는 미지수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 같은 조식에 대한 평가는 그가 행정가가 아니라 정치가였고 정치가라기보다는 유학자였고 더구나 국정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재야 지식인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조식은 이 세상을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군왕, 곧 성군뿐이었다. 여기에 조식의 한계가 있다. 그는 군주국가의 체제를 뛰어넘을 수 없는 시대에 살았고 왕도 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던 유학자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조선의 형벌은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로 이루어졌다. 이중 유배(流配)는 두 번째로 무거운 벌로 죄인을 먼 곳으로 내쫓아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일종의 무기징역이다. 관리에게 죄를 물을 때 가장 흔하게 적용한 것이 바로 이 유형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변화에 따라 곧바로 관직에 복귀할 수도 있었고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숙종 대 영남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이현일은 함경도 최북단 종성으로 유배 갈 때 주로 가마로 이동했고 대부분 역원에 묵었다. 이동에 필요한 말과 가마꾼은 대체로 경유지 군현에서 조달했다. 경유지의 수령은 말과 사람만 아니라 음식물과 노자, 유배길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다. 유배지의 처소는 유배 고을에서 마련해두었다. 부엌과 마구간, 변소 등이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었고, 그릇과 같은 일상 용품이나 쌀이나 콩, 간장, 채소도 넉넉히 마련되어 있었다. 관리나 노비가 지급되기도 했고 땔감도 수시로 대줬다. 뿐만 아니라 인근의 수령도 자주 찾아와 필요한 물품을 보태주었다.


유배와 유배 생활에 필요한 경비와 물자는 사실상 유배객이 아니라 경유지나 인근의 수령이 제공했다. 유배 과정 또는 유배 생활에 필요한 제반 경비는 전적으로 관할 또는 인근 수령에게 의존했지만 전혀 궁색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유배객이 이러했던 것은 아니다. 이는 일종의 상호부조인 셈인데, 물론 이런 관계망은 대상 인물의 학문이나 가문의 위상에 따라 그리고 정치 사회적 지위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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