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글항아리
2012년 12월 31일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주에 수백 수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백 명씩 한데 모여서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갖 원심력으로 찢어져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득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붓고도 득의한 듯 희희 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1999년 4월 15일 자 한겨레21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을 쓴 이가 한일장신대 김영민 교수라고 했다. 앞에서 묘사한 한국교회야 새로울 게 없지만 마지막에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고 언급한 글이 한국교회의 문제를 정확히 짚어낸 것이어서 한동안 그의 글을 찾았다. 이후로도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 때면 이 글이 떠오르곤 했다. 최근에 우연히 그의 저서를 발견했다. (확인해 보니 그의 저서가 서른 권이 훌쩍 넘고 이 글 발표하기 이전 저서만 해도 열 권이 넘는다) 잠깐 훑어본 내용으로는 이 글의 출처가 아닐까 싶었다. 찾던 책은 아니었지만 같은 내용이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인간상을 열 가지로 나누고 그들이 교회의 본질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하나하나 분해해 나간다. 그는 <일러두기>에서 글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은 온전한 사실도 온전한 허구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표현이야말로 이 책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런 모습이 어느 교회나 존재하기 때문에 온전한 허구가 아니고 그러면서도 각 인간상을 드러내기 위해 과장한 측면이 있으니 온전한 사실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약사인 A는 주일성수는 물론 십일조로는 충분치 않아 십이조를 드리고 찬양 인도도 하는 독실한 교회 재정부장이다. 70대 권사인 B는 교회 봉사부장이다. 젊어서 청상과부가 된 그는 궁핍하지만 하나님의 공평하신 사랑에 힘입어 어디서든 당당하다. 대학에서 성서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간혹 교회에서 설교도 한다는 C는 소문난 오입쟁이이다. 서른 어간의 미혼 여성으로 교회 ‘팔선녀’의 중심인물인 D는 ‘팔선녀’들과 함께 열심을 보이면서도 교회 부서에는 들어오지 않고 주변을 배회한다. 쉰을 바라보는 노총각 E는 예산 변두리 산골 교회의 부목사 겸 교육전도사로 목회한다. 청빈이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고 매사에 근검절약한다. 교회를 개척해 아담한 크기로 키워낸 목사인 F는 달변이기는 하나 언탐(言貪)이라고 할 만큼 말이 많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반말한다. 대형교회 장로로 담임목사와 교인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G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모범적이고 합리적이다.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고 합리적으로 돈을 모으고 교회 재정에도 크게 기여한다. 전문직도 아니고 경력도 없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어 생계를 위한 노동에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유한부인인 H는 팬시한 카페를 빌려 와인파티를 열고 또래들과 외국 단체관광을 다니고 거금을 들여 자기들만을 위한 인문학 교양강좌를 연다. 예배와 모든 모임에도 한결같이 열성적이다. 세상 끝날까지 전파할 복음의 전도자를 자처하며 나대는 노방전도자인 I는 자신의 믿음이 복음이라고 확신하고 이를 누구에게든 애써 전하려 든다. 자신의 것에는 당당하고 타인들에게 가책을 느끼게 만든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지 않으며 간혹 들은풍월로 지관 노릇도 하는 J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람살이이며, 종교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같은 각양각색의 인간상을 통해 오늘날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갖는 의미를 세밀하게 되묻는다. 이런 상황을 독자와 공유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묻고 있는 것이다. 모두 생각할만한 주제였지만 그중 특히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착실히 재산을 모은 부자’를 향한 질타가 매우 인상적이다.
“누구라도 생활양식으로 예수를 좇는 기독교인임을 자처한다면 마땅히 그 벌이와 벌이 체계를 성찰해야 하고, 그래서 남다른 수확을 신의 은총인 듯 구는 일만은 피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적절한 규모와 수준의 벌이를 모색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말이다. 많이 벌어 헌금 많이 내겠다는 변명이 얼마나 썩고 곪은 코드로 얽혀있는 것인지를, 다수의 기독교인이 내세우는 소망이라는 게 자본을 향한 호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
“교회라고 해서 나와 내 어머니 같은 약자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었다. 부자도 있었고 부의 질서도 엄연히 작동했다. 신 앞에 평등한 교회라는 이데올로기를 내건다고 해서 그것이 부자와 빈자들이 실질적인 평등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신 앞의 평등’을 말하는 보편적인 종교인 기독교의 이데올로기조차 신분과 계급에 의해 굴절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각 인간상 모습 뒤에 감춰진 치부를 하나하나 들춰내며 비판을 가한다. 때로 지나친 면도 있고 문제를 과장한다는 느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적하는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지적은 의미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저서는 삼십 권이 넘는다. 이 책을 읽고 난 느낌도 그렇고 오늘 도서관에서 그의 저서 몇 권을 살펴보고서는 그의 저서를 더 이상 읽는 게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우선 철학적인 관념이나 용어가 매우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웠고 이야기가 주제와 상황과 시기를 넘나들어 따라가기 벅찼기 때문이다. 아주 간혹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기는 한데 보물찾기처럼 그 하나를 건지자고 온 산을 휘젓고 다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나 의아한 것이 있다. 그는 예로 든 인물 중에 교회의 신뢰를 얻는 인물 몇몇에 대해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공부를 매개로 모종의 신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제 마음대로 믿음을 얻은 뒤에 그제야 신학을 한다”고 비판하며 “신학을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신념을 정당화하는데 동원한다”며 날 선 비판을 이어간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개신교인들이 공부를 안 해도 너무하다 싶을 만큼 안 한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렇기는 해도 신학이라는 게 워낙 생겨난 믿음을 정리한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만들어 낸 게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