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2010년 2월 25일
학교 다닐 때 조풍연 선생께서 라디오 심야방송에 나와 옛 서울 이야기 들려주는 걸 재미있게 들었다. 1914년생이신 선생께서는 교동초등학교(관립교동소학교)와 경복고등학교(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온전한 서울 토박이였다. 그 방송 들을 때가 70년대 초반이었을 텐데, 주로 해방 전후 무렵부터 휴전 무렵까지 이야기였으니 당시로서는 이삼십 년 전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고, 그래서 서울의 옛 모습을 손에 잡힐 듯 생생히 그려내어서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 중 적지 않은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순라꾼이 야경꾼으로 바뀐 이야기며 떡볶이가 워낙은 기름에 지져 먹는 음식이었다는 이야기까지. 진행자의 질문에 막힘없이 구수하게 풀어내는 선생의 입담은 ‘별이 빛나는 밤에’를 제쳐두고 그 방송을 듣게 만들 정도였다.
나는 휴전 얼마 후인 쌍팔년도(단기 4288년)에 명륜동에서 이주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서울, 그것도 문안에서 태어나 신혼 초 몇 년을 빼고는 지금까지 내내 서울에서 살지만 이주민이자 도시난민의 자식이라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서울 토박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강원도에서 가난을 피해 소년 상경하셨고 어머니는 평안도에서 1.4 후퇴 때 잠깐 이웃 마을에 피했다가 단신 월남민이 되셨다. 당시에는 이런 이들이 모여들면서 서울이 급속하게 팽창했는데, 문학작품에 나타난 서울에 대한 묘사를 모아 <서울 탄생기>를 재구성한 송은영 선생은 책에서 이런 이들을 ‘도시난민 출신의 이주민’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달갑지 않은 용어이기는 하지만 더 이상 적확한 표현일 수가 없어서 내 출신을 설명할 때 망설임 없이 사용한다.
그래도 평생 서울에서 살아온 탓인지 서울 옛이야기가 나오면 무척이나 반갑다. 서울 이야기이어서가 아니라 내 어린 시절이 거기 어딘가 섞여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 일이 하도 꼬여서 푸닥거리라도 한다고 찾았던 성북동 골짜기에서 굿을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4.19를 만났고, 중학교 입학했을 때는 미스코시(신세계) 백화점과 자웅을 겨루었다던 화신 백화점 2층 학생복코너에서 교복을 샀다. 아버지는 휴전 직후 군에서 휴가 나왔을 때 안국동 덕성여고 학생들에게 모자를 빼앗겨 놀림감이 되었던 이야기를 하시면서 머리를 흔들기도 하셨다.
어느 날 아동문학가 어효선 선생의 <내가 자란 서울>을 찾다가 정작 그 책은 찾지 못하고 서울특별시 시사(市史) 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이 책을 찾았다. 기억만 해두고 벼르다 이제야 읽었다. 이 책은 서울특별시 시사 편찬위원회에서 수행한 구술자료 수집의 첫 번째 사업 결과물로, 서울 사대문 안 지역의 변천사를 서울 토박이 16명의 생생한 증언으로 담아놓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서울이란 문안과 성저십리를 일컫는 말이라고 증언한다. 성저십리(城底十里)는 서울 성벽 바깥 십 리 안쪽에 있는 동네인데, 동쪽으로 중랑천 서쪽으로 불광천 남쪽으로 한강이 그 경계이다. 나 역시 그렇게 알고 자랐고, 그래서 송은영 선생의 <서울 탄생기> 중 강남이 서울에 편입된 이야기가 서울의 역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에서도 무엇보다 북촌을 중심으로 하는 안국동과 종로 일대 이야기에 관심이 쏠렸다.
한양 시절에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북촌에 노론의 권문세가가 모여 살았고, 청계천 건너 남산 자락에 있는 남촌에는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하지 않은 소론 출신의 선비들이 모여 살았다. 남산 딸깍발이 선비라는 말도 거기서 비롯되었고. 그러다 일본이 들어오면서 선비들이 사는 남촌에 둥지를 틀었다. 이후 그들의 주거지는 용산과 청파동으로 넓어졌지만, 북촌 토박이 한 분은 “일본인들이 감히 북촌에 범접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공업화로 서울 인구가 급증했다. 무작정 상경한 빈곤층과 유학온 학생들이 다수를 차지했고, 지방의 지주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찾아 상경한 예도 적지 않다. 당시 최상류층은 가회동ㆍ계동ㆍ재동에, 상류층은 혜화동ㆍ명륜동ㆍ효자동에, 월급쟁이들은 옥인동ㆍ통인동ㆍ사직동에, 의사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안국동ㆍ관훈동ㆍ인사동에, 소상인들은 이화동ㆍ동숭동ㆍ효제동에, 부유한 상인들은 종로ㆍ무교동ㆍ서린동에 자리 잡았다. 써놓고 나니 무척 넓은 지역 같지만 모두 중심인 안국동에서 걸어갈 정도의 거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안국동에는 특히 학교가 많이 모여 있었다. 지금이야 덕성여고와 중앙고등학교 정도가 남았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학교가 모여 있었다. 지금은 정독도서관이 된 경기고, 공업박물관이 된 풍문여고, 현대건설 사옥이 들어선 휘문고,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었던 경기여고와 창덕여고, 거기에 숙명여고ㆍ중동고, 그리고 경복궁 지나 서촌에는 진명여고ㆍ배화여고ㆍ경복고ㆍ경기상고까지. 그래서 내게는 안국동이라면 그저 학교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화동에 있던 경기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사 가면서 그 건물이 그대로 정독도서관이 되었다. 정독도서관이라는 이름은 학교 다닐 때도 익숙했지만 정작 그곳을 찾은 건 은퇴를 결심하고 난 후였다. 지금은 그곳이 내 서식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지금도 풍문여고 자리를 지나 덕성여고를 지나 윤보선 가옥 옆으로 해서 정독도서관을 오가다 보면 오십 년도 훨씬 넘은 옛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서울의 역사를 구술한 토박이들은 중앙청에서 고기 잡고 동십자각과 수표교 아래에서 빨래했다고 이야기한다. 소풍은 동물원 식물원이 있던 창경원으로 갔고, 멀리 나간다고 하면 자하문 밖 정도였다. 어떤 이는 화신백화점에 있었던 에스컬레이터를 놀이 삼아 탔던 기억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사실 화신백화점에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는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 들었다. 있던 에스컬레이터가 없어졌다면 모를까, 내가 드나들었던 60년대 후반 이후로 에스컬레이터를 본 기억이 없다. 있었다면 그런 명물을 몰랐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중앙청이 어디인지 동십자각이 어디인지는 알까? 예전에 동물원은 창경원(창경궁)이나 가야 볼 수 있었고, 이성 친구와 창경원 밤 벚꽃놀이 가서 춘당지에서 보트 타고 팔각정에서 함박스텍 한 번 못 먹으면 청춘이라 할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북촌 권문세가의 아흔아홉 칸 고대광실들은 삼청각이나 오진암 같은 요정으로 변해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생관광의 목표가 되는 오욕의 역사를 견뎌야 했다. 지금은 그마저도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북촌에 있던 사간원이나 관상감은 위치 표석이 남아있고 종친부(경근당)는 이전 국군수도통합병원 자리에 세워진 국립현대미술관 뒤편에 그대로 남아있다.
지방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을 보고 깍쟁이라고 한다. 야박하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흉보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구술한 서울 토박이들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그들은 서울깍쟁이는 개인주의적이나 이기적이 아니라 오히려 이타적이라고 말한다. 자리를 보고 나서야 발 뻗을 생각을 하고, 당장 어려워도 남에게 신세 지지 않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스스로 독립하려 하고, 내일을 대비하는 실용적이고 성숙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우리가 남이가” 하는 끈끈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냉정하다 싶을 정도의 모습이지만, 그 또한 서울깍쟁이의 다른 한 면인 것은 틀림없다. 나는 이 말을 한마디로 ‘자존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추워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 자존심.
내가 태어난 곳이 비록 ‘문안’이라고는 하지만 도시난민인 이주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울 토박이라고 자처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평생 서울에 둥지를 틀고 살면서 그 자존심 하나는 배운 모양이다. 지금 돌아보니 그동안 내가 살아온 면면이 그렇다. 어떻게 하다 서울 옛이야기에 빠져 별별 생각을 다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요즘 사람들이 ‘문안’이 무슨 말인지는 알까? 옛날 어른들이 “어디 가십니까” 물으면 “문안에 다녀온다” 하셨던 그 ‘문안’. 글자 그대로 사대문 안이다. 동대문-서대문-남대문-북문을 잇는 성곽 안 마을, 조선 오백 년 그 후로 백 년을 우리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온 서울의 핵심 말이다. 그러니 내 앞에서 강남 운운하지 말라. 거기는 서울이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