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싫어

by 다정



비를 싫어한다. 이것은 비의 유용함이나 낭만적인 빗소리 같은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다.


열두 살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원래는 평소처럼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1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공원 벤치나 잔디에 앉아서 함께 수다를 떨 참이었지만 하교할 때쯤 되니 예고에 없던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친구가 둘 다 우산도 없고 하니 학교에서 조금 더 가까운 자기네 집으로 가자길래 그러자고 했다. 도착한 친구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그 애의 부모님이 항상 바쁘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참을 놀다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니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장대비가 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그 빗속에 집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 갑자기 비가 너무 많이 와. 아까는 조금밖에 안 와서 그냥 빨리 뛰어서 집에 가려고 했는데 지금은 못 그럴 것 같아. 집에 가기 무서워.”

효정은 말했다.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놓을 거야. 친구에게 우산을 빌려서 집으로 오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효정은 그 뒤에 비가 금방 그친다고 하니 우선 친구에게 우산을 빌려 써서 집으로 오고, 비가 그치면 엄마와 같이 우산을 다시 돌려주고 오자는 말도 했다.

우유를 좋아하지 않지만 우유보다 따뜻한 엄마의 말에 밖으로 나갈 용기를 냈다. 그리고 친구에게 우산을 빌려 달라고 말했다. 걔가 답했다.

“미안. 우리 집에 내가 아끼는 우산밖에 없어.”


그 말을 들은 나는 왠지 버려진 느낌이 들어 그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1층으로 내려왔다. 12년 인생을 살며 그렇게 무서운 광경을 처음 보았다. 분명 아직 환해야 할 낮 시간인데 세상이 온통 어둑어둑했다. 괴물처럼 내리는 비는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기세로 떨어지고 있었다.


손에는 실내화 가방뿐이었다. 가방을 머리 위로 잠깐 올려 봐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너무 잘 알았다. 그 행동은 초라한 내 마음조차 보듬어 줄 수 없을 것이었다. 따뜻한 우유와 엄마가 있는 집으로 얼른 가야 했다. 여기서 계속 버려진 아이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내가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걸음을 내디뎠다. 비는 공평했다. 이렇게 불쌍한 처지의 나에게도 똑같이 쏟아졌다. 열 걸음도 지나지 않아 울음이 터져 나왔다. 방망이처럼 떨어지는 비는 아팠고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대성통곡을 하는데 빗소리가 너무 커서 나에게도 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늘과 내가 같이 울고 있었다.


신발장을 열었을 때 우산 보관함에 잔뜩 꽂혀 있던 친구의 아끼는 우산들이 미웠다. 죄다 아끼는 우산들만 갖고 있는 친구가 원망스러웠다. 그에게 내가 아끼는 우산만큼도 못한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사무쳤다. 사랑을 확인하러 가는 길은 그렇게 너무 멀었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변했다.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촉감이 불쾌해졌고, 그래서 비도 싫어졌다. 여전히 싫어하지 않는 것은 언제든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놓고 기다릴 엄마뿐이다.


그날 그 애가 내게 우산을 빌려주지 않은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너무 좋았던 건가. 조금 더 오래 같이 있어 주길 바랐나. 텅 빈 집에 혼자 남겨질 게 싫었나. 집으로 돌아가 엄마가 데워 주는 따뜻한 우유를 먹을 나를 시샘했던 걸까. 함께 혼자이고 싶었나. 그래서 거짓말이 필요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 우산들이 정말 아무에게도 내어 줄 수 없는 보물과 같았을까.


아마 다 틀렸을 것이다. 그 애가 아닌 나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애가 아닌 나라서 알게 된 것 하나는 내가 아끼는 우산 하나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폭우 한가운데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열두 살에 배우는 인생 교훈치고는 꽤나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쓰라림의 경험이었다.


오늘도 비가 온다. 기억은 길고 흔적은 짙어서, 비만 오면 자꾸 스스로 혼자가 되지만 지금은 비가 잠시 그쳤으니 발걸음을 재촉한다. 더운 우유와 엄마가 기다리는 곳으로. 사랑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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