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IST PROJECT
휴대폰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목록들은 공허함으로 빼곡하다. 수백개에 달하는 이름들 중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숫자를 제외하면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도 허다하다. 어떤 시기에는 분명 소중하거나, 필요하거나, 사랑하거나, 아꼈거나, 같이 일했거나, 좋아했거나, 챙기고 싶었거나, 소식이 궁금했거나해서 손가락으로 한 자씩 입력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을 번호 대부분이 화면 안에 박제된 채 존재한다.
2년의 장교 생활동안 한 부대 안에서 근무했던 수 많은 장교와 부사관의 번호를 저장했다. 그들은 나에게 소중했기도, 필요했기도, 사랑받기도, 아껴지기도, 같이 일했기도, 좋았기도, 챙기고 싶었기도, 소식이 궁금했기도 했던 사람들이었다. 전역날 짐을 싸서 돌아오는 버스 안, 얼굴을 보지 못하고 나온 누군가에게 전화인사라도 남기고 싶어서 손가락으로 목록을 쭈욱 오르락 내리락 흔들었다. 누구 몇 명을 지목해서 전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 그렇게 손가락으로 목록을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렸다 하다가 위에서부터 한 명 한 명 연락처 정보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OOO 하사는 OOO 중사로, OOO 중사는 OOO 상사로, OOO 상사는 OOO 원사로, OOO 소위는 OOO 중위로, OOO 중위는 OOO 대위로, OOO 대위는 OOO 소령으로.
2년 반의 짐을 싸서 위병소를 나서도 위병소 경계 안에 있는 이들의 삶은 계속 흘러갈 터였다. 나는 그들의 업무 능력이나 군인적인 감각과 별개로, 내가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일상이 평범하지만 그들의 발전이 오롯이 인정되는 일상이길 기원하며 전역을 맞이했다. 나의 구구절절한 마음을 그들 모두에게 하나하나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 모두의 계급을 한계단 이상씩으로 주소록에서 수정했다. 나와 그 기간을 함께 보내면서 오롯이 한 계급으로만 불리었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이 얼마나 책무에 충실했는지와 무관하게, 지극히 개인적인 주소록에나마 그들이 한 계급이라도 더 높고 막중한 사람으로 남길 바랐다. 라는 이야기를 나는 그렇게 버스 안에서 내 마음속과 주소록으로만 남겼다.
예상했던 것처럼 더이상 터전이 아니게 된 위병소 내부와 점점 단절됐다. 그 안에서 만나고 사랑했던 인연들 중 대다수는 소식을 놓쳤다. 남아있는 인연들을 통해서 건너건너 진급이나 결혼, 경사나 조사를 전해들을 뿐이다. 어쩌면 그들도 나의 행복과 불행을 건너건너 전해듣고 있을지 모른다. 군생활의 기억이 주책맞게 올라올 때마다 종종 주소록을 다시 올리고 내린다. 그들은 나와 생활했던 계급보다 적어도 한계단씩 올라간 이름으로 박제되어 존재한다. 사진에 보이는 그들의 삶 중 누구는 군복을 입은채로 남아있고 누구는 군복을 이미 벗고 새롭게 살아간다. 그들이 내가 알던 계급에서 올라가지 못한 채 군복을 벗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내 주소록에 한 계급 특진된 이름으로 남아있다. 또한 어느새 한 계급 올려서 저장해 놓은 상태보다 오히려 한두 계급 더 올라간 이들은, 그들의 실제 군복 계급장보다 한두 계급 낮게 내 주소록에 남아있다. 그들은 그들이 알지 못한 사이에 특진하기도, 강등되기도 했다. 국가기관의 막강하고 엄중한 계급 구조를 단순히 뒤흔드는 내 주소록의 어쭙잖음이 민망하다.
나도 누군가의 주소록에 서인석 중위라는 이름으로 박제된 채 남아있다. 군복무를 하고 있는 동기들 중 소령 진급에 성공한 이의 소식이 단체방에 올라왔다. 아, 어느새 내 또래가 소령이라니 라는 생각에 명치 윗쪽이 금새 훅 시리게 지나갔다. 군복을 입고 있을 때, 그렇게 나이들어 보였던 계급이 내 나이의 계급이라는 단순명료한 사실. 위병소를 나온 뒤 흘러간 시간동안 나는 무엇으로 삶을 채웠는지 묻는 송곳 같은 소식이다.
박제된 서인석 중위는 그가 위병소 안에서 살았던 이년 반의 시간보다 세 배 넘는 시간을 위병소 밖에서 이미 보내고 또 추가해가는 중이다. 불특정다수의 주소록에 서인석 중위가 어떤 모습으로 박제되어 있을까. 훌륭한 군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넣어둔지 오래다. 그저 같이 있을때 불편하지 않고, 즐거웠던 기억이 남아있는 사람이면 족하다. 어쩌면 박제되지 못하고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지워지고 채워진다.
갑자기 추워진 날, 여기보다 수 배는 더 추울 위병소 안을 떠올리다 휴대폰 주소록의 박제된 계급들을 하나씩 더 올려야 되나 나는 고심에 빠진다. 다들 박제의 여부와 상관없이 건강해달라. 행복해달라. 나는 박제된 채로 박제된 그대들의 건강과 행복을 건너건너 듣는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