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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Feb 23. 2021

부러우면

TEXTIST PROJECT

 열등감은 관계를 맺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발생 가능성이 커지는 감정이다. 누군가에 대한 부러움은 가급적 부러움에서 머무르는게 안전하다. 부러움을 발생시키는 대상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면, 부러움은 서서히 열등감으로 발전한다. 

 사람들은 열등감을 갖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부러워 하는 이보다 잘난 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혹은 다른 분야에서 스스로의 경쟁우위를 찾기도 한다. 뭐가 됐든 열등감의 감정까지 가지 않으면 그걸로 안전하다. 누군가에게 열등감이 생겨버리는 순간부터, 그 감정이 사라지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열등감 자체가 문제가 되진 않는다. 열등감은 스스로의 내부에 자리잡는 감정이기 때문에 밖으로 분출되지 않는 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못한다. 스스로를 갉아먹을 뿐이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상태부터 이미 선호될 모습은 아니지만, 열등감 이전의 단계-부러움까지만으로 감정의 동요를 묶어놓을 수 있다면 그걸로 그나마 좋다고 표현했을 뿐이다.

 열등감이 왜 문제가 되느냐, 열등감은 이유없는 적대감을 매우 간단하게 창조하기 때문이다. 열등감이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하다니..'라는 감정이라면, 여기서 적대감으로 발전했을 때 '내가 저사람보다 못하다고?'를 야기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저 사람이 뭔데?'라는 단계까지 매우 빠르고 쉽게 도착한다. 결국 '저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저 사람'의 삶과 노력은 열등감-에서 출발한 적대감-을 가진 이에 의해 매우 간단하게 훼손된다. 


 열등감을 대하기 가장 힘든 순간은 내 안에 열등감이 자리했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나를 대상으로 삼는 열등감을 마주했을 때다. 

 사람은 감정을 대체로 잘 숨기는 동물에 속한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 언어나 표현, 행동, 하다못해 눈빛 등으로 숨겨진 감정들은 조금씩 드러난다. 즉, 누군가가 나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나를 마주할 때, 아무리 숨기려 해도 '이 사람이 나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구나'는 모습은 아주 조금이라도 표출된다. 그리고 그 표출의 양은 열등감의 크기에 비례한다. 

 가령 누군가에게 부러움과 열등감 경계 정도의 감정을 가진 이가 표출시키는 그것의 크기는, 부러움인지 열등감인지 예민하게 보지 않는 이상 크게 구분가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거의 적대감에 가까운 열등감을 가진 이의 그것과는 제 3자의 눈에조차 바로 느껴질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 

 여기서 나는 열등감의 대상이 되는 이를 '대상자', 열등감을 가진 이를 '표출자'라고 표현하며 말을 이어가 본다.


 이미 적대감을 넘어선 수준의 열등감이 발현된 이와 마주하는 일은 꽤 귀찮다. 이 때부터는 열등감-그러니깐 적대감-을 가진 이와 도무지 가까워지기 힘들고, 업무를 같이 하는 등의 활동은 어렵다. 이것은 그저 표출될 뿐, 표출자와 대상자 사이의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며, 표출자와 대상자 쌍방에는 열등감에 대한 어떤 교감이나 논의가 없는 상태다. 표출자가 대상자에게 오로지 일방적으로 열등감에서 발전된 적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상자가 표출자에게 손을 내밀기도 어렵다. 물론 표출자를 어르고 달랜다 한들, 적대감으로 발전한 상태에서는 관계에서 부작용을 낳을 확률이 오히려 크다.

 부러움-에서 출발하는 열등감-을 야기하는 능력이나 조건, 요소는 지극히 표출자의 주관에 의해 판정된다. 제 3자가 봤을 때는 그것이 그다지 부러운 요소가 아님에도, 표출자에게만 부럽고 시기 대상이 되는 요소일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열등감의 대상자에게 있어서, 표출자는 이에 낀 오징어찌꺼기 수준으로 귀찮을 뿐 삶에 지장이 없다. 바로 그 귀찮음 수준. 그것이 열등감의 표출자가 차지할, 대상자에 대한 상대적 위치가 되어버린다.


 이 글을 왜 이리 길게 썼냐, 별반 잘나거나 훌륭한 점이 손에 꼽을 정도로 없는 나조차, 나를 대상으로 표출된 적대감을 마주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눈치가 빠른 편도 아니기 때문에 표출자가 부러움의 감정을 갖고 있을 때도, 거기서 발전한 열등감을 갖고 있음에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그 감정이 눈에 보일 정도 수준까지 왔다는 것은 이미 해결 불가능한 적대감이 되었다는 의미다. 부러움에서 출발했을 적대감을 대하는 일은, 그냥 조금 짜증나고 귀찮은 정도에서 끝났다. 하지만 표출자를 이해하려 해보니깐 연민이 생기더라. '연민'말이다. 

 미안함이나 씁쓸함, 안타까움이나 아쉬움이 아닌, 가여움. 대체 뭘 그렇게 부러워하고, 열등함을 느끼며 이유없는 적대감으로 발전시켜 왔을까, 참 시간도 많구나, 싶은 딱 그런 수준의 가여움. 

 대상자는 표출자 대비 현저히 적은 감정의 소모가 발생한다. 누군가를 적대하는 일은 체력적, 정신적으로 힘든 일인데, 그것이 부러움에서 출발했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부러워했던 상대방, 열등감을 느끼게 했던 상대방, 그것이 적대감으로 까지 발전하게 만든 상대방을 싫어하기 위해서는, 부러워했던 무언가의 가치를 어떻게든 깎아내려야 하고, 그 깎아내림의 정당함을 만들어내야 하며, 나름의 논리를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상대를 적대하면서도 '이 적대감은 충분히 옳고 근거있는 행위야'라고 비로소 안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적대감은 대상자에게 당당하게 표출되지 못하고,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의 자리에서 표출된다. 

 뒷담화다. 


 그래서 나는 '부러우면 지는거다'라는 일종의 사회적 규정과도 같은 말을 뒤로 밀어 놓기로 했다. 어쩌면 그냥 부러워 하는 것까지가 내 인격과 영혼에 가장 해를 덜 끼치는 방법일 것 같다.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거기서 감정이 더 발전하지 않고 종료되는 순간부터는 진심으로 부러움의 대상을 응원하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배우려고 노력하게 된다. 나의 그릇은 이런 진심어린 부러움과 응원을 쏟을만큼 아직 넉넉하지 못한 편이지만, 내가 마주했던 열등감-적대감-의 표출자가 쏟았을 정신과 시간 소모를 생각하면서, 정신과 시간을 좀 더 알차게 쓰기 위해서라도 부러움에서 감정을 종료시키기로 다짐했다. 


 혹시 누군가가 부러워서 싫었던 적이 있는가? 혹시 누군가가 부러워서 스스로가 작아진 적이 있는가? 혹시 누군가가 부러워서 스스로가 작아져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 누군가가 싫었던 적이 있는가? 그러지 말자. 비록 생각 뿐일지라도 도리어 당신의 영혼에 호크룩스(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어둠의 마법 : 누군가를 살해하면서 스스로의 영혼을 나누어 보관하는 마법, 시전시 영혼에 매우 큰 상처가 남음)를 만들 때처럼 큰 상처가 남는다. 정작 당신이 적대한 그 누군가에게는 그저 귀찮을 뿐인 당신이, 굳이 표출자가 되어 정신과 시간과 인격과 영혼을 손해볼 필요가 전혀 없다. 그냥 부러우면 져보자. 멀리서 보면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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