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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Jul 25. 2021

소비의 명분

TEXTIST PROJECT

 본론부터 말하겠다. 나는 태블릿이 사고 싶다. 이미 수 년 전부터 그랬다. 하지만 살 수가 없다.

원체 구매라는 행위에 보수적으로 굴긴 한다. 그렇대도 필요하다거나 사야되는 물건을 안 사진 않는다. 오히려 사야 된다고 결정된 후에는 일말의 고민없이 결제버튼을 눌러버릴 정도다. 그런데 왜 태블릿은 그렇게 수 년 동안 결제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을까. 

 전자기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내가 '태블릿을 사고 싶다'고 생각한 이후 꾸준히 내 내면에 자리한 '태블릿 지름신'을 자극했다. 덕분에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 장바구니에 꽤 자주 갤럭시탭S 시리즈가 담겼다. 문제는 결제까지 이어지지 않는 탓에 제일 처음 담겼던 갤럭시탭S3부터 최근 출시된 갤럭시탭S7까지 담겨버린 것. 물론 이미 수 년이 지난 모델은 품절 표시가 떠서 결제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자유로운 복장과 자유로운 시간에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지만 이처럼 구매에 있어서는 쇄국정책, 봉건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건 결국 '명분'이다. 그렇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형배(하정우 분)가 말한 "맹분이 읎다 아입니꺼"할때 그 명분. 

 그러니깐 '태블릿을 갖고 싶다'에서 '태블릿을 가져야 한다'로 도무지 문장이 전환되지 않는다. '왜'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다보니 수년간 새 모델들이 출시되었음에도 장바구니에서 태블릿들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채워지기만 한다. 

 종종 상술한 이 친구를 만나면 그의 태블릿(이 친구의 태블릿은 아이패드다.)을 만져보게 된다. 화면을 터치할 때의 느낌, 영상이나 사진을 선명하게 보고 스마트펜으로 필기할 때의 느낌이 짜릿하다. 분명 '사고 싶다'는 마음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의 태블릿을 만지는 날은 높은 확률로 최신 태블릿을 검색하고, 그 기기에 맞는 액세서리까지 꼼꼼히 검색한 후 장바구니에 추가하는 날이다. 


 나는 원고작업 등등을 할 때 노트북을 많이 쓴다. 계산해보니 전역 이후 내 노트북은 총 4개의 모델을 거쳤다. 평균 2~3년에 한번 바뀐 셈이다. 그렇게 치면 지금 쓰고 있는 노트북은 4년 가까이 쓰고 있으니 상당한 기간동안 나와 함께 해준 셈이다. 900그램이 채 안되는 무게 때문에 여기저기 갖고 다니기 부담이 없다. 안타깝게도 이 모델도 슬슬 교체의 기한이 다가왔다. 일단 처음 구매할 때 돈을 좀 아껴보고자 CPU를 i3으로 샀더니 사용기간이 늘어날 수록 속도 저하와 발열이 느껴진다. 그래서 작년 중순부터는 노트북을 바꾸기 위해 마음에 찜해놓은 모델이 있다. 그 모델이 좀 비싸서 구매를 못하고 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고사양의 작업(게임같은)은 어차피 데스크탑으로 하고 있고, 노트북은 글쓰는 용도가 7할 이상이니 아예 태블릿과 키보드 형태의 북 커버를 사는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 그래서 사고 싶어서 찜해놓은 노트북과 태블릿의 무게를 비교해봤다.(나에게는 무게와 크기, 디자인이 제일 중요하다.) 찜해놓은 노트북이 1.1kg을 조금 넘고, 태블릿은 무려 500g이 안되더라. 키보드 케이스를 합해도 1kg이 안된다. 그동안 단지 '웹툰을 좀 크게 볼 수 있다' 수준의 명분에서, 이번에는 진정으로 '노트북을 대체할 수 있다'는 괜찮은 명분으로 바뀐게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그저께부터 태블릿을 오랜만에 다시 쭉 보고 있다. 암만 그래도 역시 디자인은 노트북이 이쁘다. 게다가 사고 싶은 노트북 모델은 터치와 스마트펜 인식까지 된다! 태블릿의 역할을 윈도우 기반에서 대체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녀석이다. 즉, 노트북을 대체하는 용도라는 태블릿 구매의 명분이 생겼는데, 태블릿의 강점으로 여겨졌던 요소가 노트북에 생김으로서 오히려 태블릿 구매의 명분을 상쇄시켜 버렸다. 태블릿 구매의 명분은 참 멀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아직까지 태블릿도 노트북도 새로 사지 못하고 있다. 명분과 별개로 지갑은 얇다. 지갑이 두꺼워지는 시기가 온대도 소용없다. 이놈의 복잡하고 옹졸한 구매 프로세스는 어쭙잖은 명분론을 내세우며 또다시 장바구니만 채울게 뻔하다. 차라리 사고싶어 하지나 말면 밉지나 않을 것을. 태블릿 하나 사기 참 어려운 서인석의 뇌구조를 탓하며 '품절'로 바뀌어버린 구 모델 태블릿들을 장바구니에서 삭제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기능상이나 용도상이나, 둘 다 사는게 맞긴 하니 더욱 할 말은 없다.


 덧붙이면 이 글의 제목인 '소비의 명분'은 이 글에 등장하는 친구와 함께 쓰기로 마음먹은 책의 제목이다. 살면서 이미 겪었고, 앞으로 겪을 다양한 소비들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게 엮어보려고 마음먹었지만, 안타깝게도 각자의 일상이 바쁘다는 '명분' 때문에 진행되지 않고 있다. 원고 작업의 강력한 명분이 언제 생길런지 게으른 스스로를 탓하며 글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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