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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Jul 25. 2021

이루마와 나

TEXTIST PROJECT

 내 귀 속을 파고드는 음악 리스트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시기마다 변한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리스트도 분명 존재한다. 음악을 재생시켜주는 하드웨어가 카세트에서 CD로 변하고, CD에서 MP3플레이어로,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변하기까지 그렇게 많은 음악들이 내 기기와 귀를 거쳐갔다. 이루마는 변하지 않는 몇 안되는 리스트 중 하나다.

 기억에 남는 순간은 이루마의 정규 2집인 'First Love'앨범의 리패키지를 샀을 때다. 흰색 디지팩으로 만들어진 이 앨범의 겉비닐을 뜯을 때, 잘못해서 앨범 자체의 비닐을 같이 일부 뜯어버렸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앨범은 지금도 이 부분이 살짝 뜯어진 채 나의 CD장에 꽂혀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2005년), 학교 맞은 편 음반매장에서 저녁식사 시간에 구매한 후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뜯어보다가 생긴 일이다. 

 'MayBe'라는 대중적으로 매우 성공한 곡이 담겨있는 앨범인지라 지금도 매우 자주 듣는다. 그리고 한참 지난 2009년 무렵에는 한 시트콤에서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축하와 슬픔을 담은 생일 선물로 피아노를 연주해주는 장면에 'River Flows In You'라는 곡이 쓰이면서 때늦은 인기를 다시 얻은 앨범이다. 사실 앨범 자체가 대중적으로 사랑받을만한 곡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앨범의 어떤 곡을 들어도 편안하다. 사람들의 듣는 귀는 대부분 비슷한지, 'River Flows In You'는 2020년에 빌보드 클래식차트에 올라갔다. 무려 나온지 15년된 곡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사랑받고 있다. 


 앨범의 소개를 하려는건 아니니 이 이야기는 정도로 접어두자.

 어쨌든 이 고등학생은 청소년 또래가 대부분 그러하듯 대학 진학의 압박과 예민한 감수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한 감정이 내면에서 튕겨져 나오려 할 때마다 MP3 플레이어에 담겨있던 이루마의 음악들은 그 좁은 내면을 조금이나마 더 풍부하고 풍성하게 넓혀주곤 했다. 

 나는 이 답답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주로 걸었다. 낡은 우리 아파트를 지나 쭉 이어져 있는 똑같은 모양의 단지들을 끝없이 따라 걷곤 했고, 그 때마다 이루마의 음악과 함께였다. 학교 안에서 답답할 때면 로비 -라고 부르기엔 소박한- 공간의 긴 의자에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해가 져가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때도 이루마의 음악은 귀에 머물렀다. 

 특히 이 시기에, 나는 이루마의 음악들 중에서도 현악기나 기타와 함께 연주된 편곡 곡들을 골라서 재생시키곤 했다. 대중적이고 편안한 느낌의 원곡들은 현악기와 어우러져서, 편안함만으로 완전히 담을 수 없었던 웅장함을 마음 속에 얹어 주었다. 그때 나의 셋리스트는 'Kiss the rain'의 4중주 버전, 'When the love falls'의 4중주 버전, 'Indigo'와 'Chaconne'가 기타와 함께 연주된 버전 등이다. 

 '약속... Our Same Word'라는 제목의 곡이 있다. 이 곡은 세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피아노 버전과 오케스트라 버전, 그리고 '어떻게 날 잊어야 하는지'라는 제목으로 가사까지 붙여 이루마가 직접 부른 곡까지이다. 이 세가지 버전을 나는 모두 좋아하지만, 해당 앨범의 4번째 트랙으로 수록된 오케스트라 버전의 '약속... Our Same Word'라는 곡을 가장 좋아한다. 

 이루마의 곡들은 대중적으로 성공한 곡들이 많기 때문에 따뜻하고 밝으면서도 한켠에 슬픔을 한방울씩 담아놓은 곡들이 많다. 'River Flows In You'는 이런 슬픔의 대중적 감정을 아름답고 편안하게 표현한 곡 중 하나다. 

 하지만 내가 이루마의 곡을 좋아하는 이유는 '표현하기 어려운 설렘이라는 감정'을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게, '기대'와 '희망'을 극대화하여 표현하고, 그것이 청자의 귀와 마음에 닿았을 때 사람을 뒤흔들 정도의 강렬함으로 폭발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다른 여러 히트곡들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약속'이라는 곡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이루마의 곡을 좋아했던 나만의 그 이유를 가장 완벽하게 명징해낸 완전체가 바로 이 곡이다, 라고 나는 이 앨범이 나온지 십수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단호하게 말한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올해는 이루마의 데뷔 20주년이다. 그래서 기념앨범이 나왔다. 여덟트랙짜리 'The Rewritten Memories'라는 제목의 앨범이다. 기존에 나왔던 곡들을 모두 편곡하고 코리안심포니와 협연하여 재녹음했다. 사실 위에 쭉 써내려갔던 이야기들은 나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었을 뿐, 저 정도로 정형화하여 기록해 놓은 적은 없다. 고등학교 무렵부터 이루마의 음악들을 느꼈던 기억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나이 다른 시절 다른 상황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주하면서 다른 느낌으로 이루마의 음악을 쭈욱 느껴왔을 뿐이다. 삶을 더하며.

 그런데 이렇게 오케스트라와 협연된 앨범을 플레이한 바로 그 순간, 이루마의 음악과 함께 해온 여러 시절들 중 가장 아래 페이지에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던 기억들이 재생되어 버린 것이다. 학교 중앙 로비를 배회하며 들었던 이루마의 오케스트라 버전 곡들을 듣던 바로 그 순간들 말이다. 


 교복을 입고 안경을 쓴, 여드름이 많고 수염을 잘 정리할 줄 몰라서 입 위가 살짝 베여있는 비쩍 마른 청소년이 내 앞에, 이어폰을 꽂은 채 마주섰다. 키는 나와 비슷했다. 뭘 잘 못먹고 다니는 걸까? 이것저것 잘 먹으라고 괜한 조언을 한다면 이 친구는 "자기 전마다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는데요?"라고 대답할거 같다. 안경은 어찌나 두꺼운지 약간 옆에서 보면 눈 부분의 얼굴 각이 다르게 보일 정도다. 아마 거울 앞에서 여드름 고민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웬만하면 안짜고 약 바르는게 나을거다,라고 말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넌 4중주의 Kiss the Rain을 듣고 있니?"라고 물었다. 

"네, 아저씨가 듣는 Kiss the Rain은 더 웅장해보이네요. 나는 그걸 들으려면 십여년을 훌쩍 지나보내야겠고요."라고 그 아이는 답했다. 

나는 이 아이에게 뭘 말해줘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가슴이 벅차서 수 많은 단어들이 입 안에 맴돌다가 나는 겨우, 

"하지만 나는 이제 더이상 너가 듣는 4중주의 Kiss the Rain을 들으며 느끼던 감정을 느낄수 없어. 그 느낌은 정말 소중한 거였어."라고 말을 흐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아이도, 나도 서로를 보며 그저 희미한 웃음을 띄었다. 그리고 재생되던 곡이 끝날 때 즈음, 서로는 서로에게서 점점 사라졌다. 


 다행이다. 

 이루마의 음악이라는, 시간을 넓고 길게 아우르는 매개체 덕분에, 잠시 그 친구를 마주할 수 있었다. 가슴 벅차고, 이상하게 아프면서 눈물이 울컥하는, 희한한 순간을 뒤로 한 채 현실의 시선으로 돌아왔다. 

 다시 나는 그 음악들을 들으며 일상 조각들을 맞춰 나갈 예정이다. 이렇게 조각들이 맞춰지다가 돌아보면, 언젠가 교복을 입은 나를 마주보며 벅차했던 아저씨인 나를, 더 늙고 나이든 내가 바라보며 지금보다 더욱 가슴벅차게 바라볼 순간이 있을 것 같다. 시간을 거슬러 존재하는 나를 바라볼 때, 부끄럽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서인석이라는 이름이 적힌 교복을 입은 채, 고개를 까딱 하고 등돌려 멀어지는 고등학생을 보며 많은 생각이 부유했다. 나는 2021년의 이루마 곡을 들으며, 2005년의 이루마 곡을 듣고 있을 그 친구에게, 그저 마음 속으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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