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미안

TEXTIST PROJECT

by 서인석

데미안을 처음 읽었을 때, 아마 속으로 꽤 욕했던 것 같다. '대체 이게 왜 명작이지?' 정도의 감정이었으리라. 평론가라는 자들은 적당히 그럴 듯해 보이고, 적당히 어려운 책에 후한 점수를 준 후, 당신네들이 얼마나 상위의 지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 보이려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성급하고 편협한 나의 생각이 깨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첫 데미안을 만난 뒤, 그는 잊혀질 때쯤마다 꽤 자주 슬며시 나의 내면에 손짓했다. 현실에 쫓기는 자아를 찬찬히 돌아봐야 하지 않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들릴 때, 항상 데미안은 책꽂이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여전히 데미안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이젠 그냥 그 어려운 느낌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제 읽어도 늘 다르게 읽히는 책, 그래서 늘 새롭게 읽히는 책이다. 그때 그때 내가 어떤 상황이고, 어떤 생각을 주로 하고, 누구랑 자주 어울리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똑같은 문장으로 구성된 데미안은 늘 다른 목소리를 낸다.


지난 1월부터 두 명의 친구와 인문학 이야기 모임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한 명의 제안으로 시작된 모임의 목적은 짬을 내서라도 회사생활 이외의 소양을 쌓아보자는 의도였다. 똑똑한 친구들과의 모임인만큼 배울 점이 많다. 이번 회차의 선정 도서가 바로 데미안이었다.

나보다 큰 그릇과 깊은 깊이를 가진 이들에게 어떤 '데미안'들이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혹은 그들에게 어떤 '베아트리체'나 '에바 부인'이 있었을지도 궁금했다. 다들 나처럼 쓸데없어 보이는 진지한 상념과 고민에 종종 빠지는지 궁금했다. 지나고 보면 우습기까지도 했던 고민을, 싱클레어처럼 해본 적이 있었을지 궁금했다. 두 친구도 나처럼 사람들의 내면의 목소리에 종종 두려움을 느끼는지 궁금했다.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쓴 데미안은 1차 세계대전 후 실의에 빠진 독일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대적 상황을 봤을 때, 고뇌하고 방황하는 싱클레어의 모습은 당시 독일인들의 모습을 투영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 전사자들의 유품에서 두 번째로 많이 발견된 책이 바로 데미안이다. 첫 번째는 성경.


나, 서인석은 어릴 때 상념과 몽상이 잦았다. 판타지 같은 상상들부터 다소 무거운 주제의 생각들까지 많은 시간을 내면과의 대화에 흘려보냈다. 이런 모습은 어른이 되어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내면과의 대화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빠져나오기 힘들고 무거워진다. 심연에 허우적대다보면 번뜩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고 무의미한지 마주하게 된다. 과연 인간의 존재와 자아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까라는, 결코 답을 내릴 수 없는 그런 주제.

세계대전 정도는 아니지만 하루하루 일상과의 전쟁을 마주하는 하나의 먼지가, 문득 정신차릴 때마다 데미안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다. 심장을 때려오는 소리에 명쾌한 답을 내릴 순 없고, 오히려 막다르고 높은 벽과 부딪히며 울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내면의 질문에 힘들어했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데미안에 쓰여져 있다는 사실이, 결코 나 혼자만 마주하는 고난이 아니라는 증빙처럼 다가온다. 내 내면의 성장을 스스로 인지할 순 없겠지만 싱클레어처럼 나에게도 다양한 순간의 데미안이 있을 거라는 희망. 시나브로 거치게 되는 다양한 성장들을 지나보낸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데미안과 동일한 자아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하지만 반짝이는 기대 때문에.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당신들의 데미안, 당신들의 에바 부인, 그리고 당신들 스스로에게 담겨 있는 싱클레어의 이야기를 듣고, 또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런 진지한 주제의 이야기는 술자리 혹은 '인싸'들의 자리에서 외면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당신들에게 직접 꺼내는 대신에, 당신들을 떠올리며 데미안을 펼칠 뿐이다. 언젠간 내가 당신들의 데미안이 되고, 당신들이 나의 데미안이 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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