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해서 좋은 곡의 시대에, 좋아서 통한 곡

TEXTIST PROJECT

by 서인석

스트리밍 음원 사이트의 시대이지만, 내가 스트리밍 사이트를 이용하는 방법은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르다. 스트리밍 사이트는 1분 미리듣기 용도로 주로 쓴다. 신보를 출시한 뮤지션의 전 트랙을 1분씩 들어본 후, 괜찮다 싶으면 실물 앨범을 구입한다. 다만, 요즘에는 트랙 수가 적은 미니앨범이 많기 때문에 구매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다. 이런 경우는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음원을 개별로 다운받는다. 어쨌든 스트리밍 사이트를 이용하는 나의 주 목적은 옥석을 가리기 위한 1분 미리듣기.


작년 3, 4월 경이었다. 늘 그렇듯 한 앨범의 전 트랙을 스트리밍으로 들었다. 이 앨범은 이미 한번 발매되었던 정규 앨범의 리패키지 형태였기 때문에 굳이 구매 의향은 없었다. 원 앨범에서도 모든 트랙의 퀄리티가 좋았기 때문에 진작에 구매했고 CD플레이어에 자주 머무르고 있었다. 리패키지에는 세 곡이 더 추가되었기 때문에 나는 새로 추가된 세 곡만 더 들어보고 개별 곡으로 구매하려 했다. 웬걸, 이 세 곡은 원래의 정규 앨범에 있던 트랙들과는 또 다른 매력과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앨범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중복되는 열 한 곡의 기존 트랙을 감안하고도 리패키지 실물앨범을 구매했다.


앨범을 재생했을 때의 만족도를 제대로 담아내기 쉽지 않다. 정성들여 만든 예술작품을 듣는 느낌. 앨범 제작자들이 곡 하나하나에 진심어린 메시지를 담으려 최선을 다한 느낌이 온전히 전달됐다. 게다가 음악 자체가 잘 만들어진 탓인지 어렵지 않게 흥얼거리게 됐다.

안타깝게도 이 앨범에 담긴 곡들이 요즘 차트 색깔과는 조금 달랐는지, 그렇게 이 뮤지션의 앨범은 그저 내 방과 차, 내 휴대폰에서만 재생되면서 시간이 흘렀다.



차트를 보면 알쏭달쏭하다. 한번 듣고 말 음악들도 많은데 상위권에 항상 자리한다. 온 국민의 우상이 된 듯한 트로트 가수의 음악을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스트리밍 사이트의 차트 곳곳에 머무르고 있다. 차트를 통해서 귀에 스며 들어진 아이돌 가수들도 많지만,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이돌 가수 또한 많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대부분 차트 상단에 머무른다. 통했기 때문에 좋은 음악들의 시대다.


팬덤의 힘이 막강해진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음원의 성공 서순은 조금 이상해보인다. '좋은 노래'가 대중들에게 '통하는' 것이 맞는 순서 같은데, 아니다. 거대한 팬덤은 음악의 호불호를 떠나서 자신의 가수가 음악을 발매하면 일단 스트리밍을 한다. '스밍총공'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팬덤이 아이돌의 신곡을 순위에 올려놓기 위해 집중적으로 스트리밍하는 행위를 말한다. 일종의 응원이다.

이렇게 되면 음악의 '좋음'을 대중들이 판단하기 전에 일단 상위권에 응원받은 곡들이 자리한다. 차트 상위권에 있기 때문에 팬덤과 관계없이 차트로 음악을 듣는 다수 대중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통했기 때문에 상위권의 곡들은 좋은 곡이 된다.



이상한 일이 생겼다. 한동안 나만 듣는 줄 알았던 작년 봄의 그 앨범, 특히 그 중 한 트랙이 언제부턴가 드문드문 거리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차트에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발매된 지 반년이 훌쩍 지난 음악이다. 그러고 마는 줄 알았는데 엉금엉금 차트의 상단으로 올라온 그 노래는 제일 위에 깃발을 꽂더니 한동안 내려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소위 말하는 역주행.

이쯤되면 눈치챘을지 모르겠다. 가수 윤하의 정규 6집 리패키지 열 한 번째 트랙인 <사건의 지평선> 이야기다.


나는 윤하의 골수 팬은 아니다. 근데 이상하게도 수백 개의 내 음반들 중에는 윤하의 음반이 꽤 많다. 윤하여서 구매했던게 아니다. 이 글 초반부에 언급한 것처럼 1분 미리듣기로 트랙들을 들어보고 좋은 노래가 많으면 구매할 뿐인데, 윤하의 음반들은 이 견고한 필터를 자주 통과했던 것 같다.

<사건의 지평선>은 음악이 성공하는 이해가능한 순서의 사례에 딱 들어맞는다. '통해서 좋은 곡'이 아닌, '좋아서 통한 곡'이 확실하다.


나는 누군가의 팬덤으로 활동해보기는 커녕 가수의 콘서트에 가본 적조차 거의 없다. 나는 단지 좋은 음악은 대중들에게 통할 거라고 믿는, 순진무구하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내 진심은 책꽂이에 들어찬 수백 장의 CD들이 증명한다. 대중은 넓고 개개인은 천차만별이라 대중음악이 모두의 취향을 맞춰줄 순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감동적인 그림, 아름다운 소설, 깊이있는 영화가 그런 것처럼, 울림을 주는 음악, 그야말로 좋은 음악이라면 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건의 지평선이 차트를 반대 방향으로 오랜 시간을 돌아 올라온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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