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에 1년 동안 살게 됐다
그 날도 나는 일단 밖으로 나왔고, 스타벅스에 앉아 있었다.
이 스타벅스는 다른 부다페스트의 스타벅스에 비해서 한국인 유학생들이 여럿 자리잡곤 한다.
부다페스트의 명문대인 외트뵈시로란드 대학교(주로 ELTE:엘떼 라고 부른다.)가 근처에 있고,
이 학교에는 한국인 교환학생들이 꽤 있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리타국임에도 불구하고
이 스타벅스에 한국인이 앉아있거나 한국어가 들린다고 하더라도 엄청나게 신기하진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이 날은 조금 달랐다.
헝가리에서 지내는 동안 지방에 있는 대학교에서 ‘여름학교’라는 프로그램에 합숙으로 참여했었다.
데브레첸대학교와 에게르대학교에서 2주씩을 보냈다.
그런데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는 두 한국인 남자 중 한 명이
에게르대학교 여름학교 메인 홍보사진에 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여름학교 기간동안 매우 자주 홈페이지를 접속했었기 때문에 ‘내적 친밀감’이 있었고,
마치 연예인을 본 듯한 기분도 들었다.
두 한국인은 공부를 하는 듯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인사를 붙이고 싶었지만, 방해를 하고 싶진 않았다.
언제 다가가서 인사를 해야 하는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도무지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도 해야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그들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순 없었고,
이내 포기한 채 내 일에 집중했다.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후 갑자기 두 남자는 서로 다른 테이블로 갈라서 앉았다.
두 남자 중 한 명은 나와 가까운 자리로 옮겨왔고, ‘내적 친밀감’ 남자는 먼 자리로 앉았다.
곧 헝가리 여성이 카페로 와서는 자연스럽게 내 옆의 남자와 인사를 나눈 후 앉았다.
그들은 서로 한국어와 헝가리어를 가르쳐주는 ‘언어교환 프로그램’을 주기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 자리의 다른 한국인 남자를 보니, 그 또한 다른 헝가리인과 언어교환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후, 내 일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됐다.
못내 아쉬웠던 나는 한국인 남자에게 ‘한국외대에서 오셨냐’며 말을 붙이며 일어났다.
(보통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어를 구사하는 한국인 대학생은
한국외대 헝가리어과 교환학생일 가능성이 높다.)
남자와 나는 몇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나도 같은 교수님들에게 헝가리어를 배웠기 때문에 공감대를 만들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남학생은 경계 반, 쑥쓰러움 반으로 나를 대하는 것이 보였기에 더 가깝게 대할 순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옆의 여성이 활발하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그녀가 바로 번더(Vanda)였다.
이제는 반대로 내가 조금 어리둥절하면서도 경계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번더는 엄청난 마당발이고 누구에게나 말을 잘 붙이는 성격이었다.
내 인스타그램 주소를 받아간 번더는 활발하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녀는 한국인 친구를 많이 만들고 싶어했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했다.
번더의 입장에서는, 마침 딱 그런 시기에
어느정도 헝가리어를 배우고 있으면서도 시간까지 넉넉한 편인 사람을 우연하게 알게 된 셈이었다.
그 덕분에 나도 반사이익을 얻은 셈인데,
내 헝가리 경험의 깊이는 번더를 만나기 전과 후가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절대로 오해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번더와 친구가 될 때부터 내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려줬다.
물론 번더의 의도도 결코 이성적인 관계가 아니었고.
나는 아내와 연락할 때도 번더의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아내에게도 걱정과 오해를 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늘 그렇듯 걱정과 오해보다도, 내가 헝가리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길 응원했다.
번더는 스물 여덟 살의 프리랜서 영어 강사였다.
그리고 교육과 콘텐츠 사업을 시작하려 준비 중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미 한국에서 9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동안 거주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정한 꿈이 ‘한국에 정착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번더의 활발함과 친절함, 헌신적인 성격을 제외하더라도
번더와 내가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한국 정착’이라는 목표에 내가 어느정도 도움될 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후 번더와 빠르게 가까워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이미 헝가리를 매우 사랑하게 된 외국인이었다.
번더는 이 점 때문에 나에게 최대한 다양하고 훌륭한 헝가리의 기억을 남겨줘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번더는 부다페스트의 명소들을 가이드 해주었다.
유럽 전역에서 구경오는 부다페스트의 크리스마스 마켓도 함께 가주었고,
음식과 관습에 대해 알려줬다.
우리 집에서 몇몇 한국 친구들을 초대해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때는
요리 도구와 재료를 가져와서 헝가리 전통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헝가리 새해맞이인 ‘실베스테르(Szilvester)’에 초대해서 전통 풍습을 알려주기도 했다.
헝가리어 시험을 치러 갈 때는 함께 가서 시험 절차를 도와주고 연습 상대가 되어 주었다.
1월부터 출근할 때는 가끔 점심 도시락을 챙겨주기도 했다.
(헝가리나 유럽은 외식비가 비싸기 때문에 도시락을 챙기는 문화가 있다.)
번더 이야기를 할 때, 또 빼놓을 수 없는 친구가 비키(Viki)이다.
비키는 번더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지만 나이차는 좀 나는 편이다.
번더는 20대 후반이고 비키는 나와 동갑이었으니 적어도 8~9살의 차이가 있다.
번더가 나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받아간 후 아직 DM으로만 연락을 주고받던 때에,
번더는 나에게 언어교환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나 또한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어 시험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고맙게 생각하며 약속을 잡았다.
언어교환으로 만나기 전 날, 부다페스트에는 헝가리의 한국문화원이 주최한 특별한 강의가 있었다.
무려 최재천 교수가 강의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지역전문가 동료와 함께 이 강의에 참여했다.
그런데 번더가 이 자리에 참여해 있는 것이 아닌가.
엄청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알고보니 번더의 전공은 생물학이었고,
한국에 대한 관심과 전공적 지식 때문에
최재천 교수의 강의에는 당연히 관심을 갖고 참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친구인 비키를 함께 데려왔던 것.
이날의 일에 대해 번더가 나중에 얘기해주었다.
“최재천 교수님 강의를 비키에게 함께 가자고 했었거든.
그리고 그 강의를 기다리면서 나는 비키에게
너의 인스타그램을 보여주며 ‘이 친구가 새로 생긴 내 한국인 친구야.
내일 언어교환을 하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가자!’고 하고 있었지.
그런데 비키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 저기 앉아있는데?’라고 하는거야!”
나는 2024년 3월부터 2025년 3월까지 헝가리에 살았는데
번더와 비키를 알게 된 게 2024년 11월이니까 계산해보면 출국때까지 약 4~5개월만 교류한 셈이다.
그렇지만 짧은 기간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번더와 비키는
외국인 서인석에게 헌신적으로 많은 경험과 친절을 베풀었다.
내가 파견된 프로그램의 이름처럼 ‘지역전문가’에 한걸음 더 다가간 기분도 들었다.
어디가서 ‘당장 연락할 수 있는 헝가리인 친구가 있냐’는 질문을 받으면
고민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번더와 비키는 한국에 정착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친구들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5년, 이미 번더와 비키는 한국에 들어와 있고,
내가 헝가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서의 일상을 꾸려 나가고 있다.
새로운 세상과 환경을 만날 때,
그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과 가까운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렇지 않을 때와 차원이 다른 깊이를 선사한다.
‘새로운 세상’이라는 집을 밖에서 스윽 둘러보며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의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 보는 것과 같다.
우연한 계기로 가까운 친구가 생긴 덕분에,
헝가리라는 세상의 문을 열고 한발짝 더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덧붙여,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다소 진부한 속담도 있는데,
지구 반대편에서 온 동양인이 어떤 사람인지, 번더가 알았을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친절하고 헌신적이었던 번더에 대한 감사함은
한국에 돌아온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따듯하게 남아있다.
번더에게, 그리고 비키에게 감사를 이 글에 담는다.
언젠가 그들이 한국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알게 되면 이 글을 읽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