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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Jun 19. 2020

코로나19와 가톨릭

TEXTIST PROJECT

 천주교의 미사가 재개됐다.
 코로나19의 전염 예방을 위해 재빠르게 미사를 중단했던 천주교가 교구별로 미사재개를 시작하고 있다. 약 두달여 만이다. 한국 천주교 역사상 주일미사를 포함한 미사를 중단한 것은 236년 만에 처음이었다.

 가톨릭은 역사가 길었던만큼 큰 부침들을 겪었다. 인류사에 많은 죄악들도 남겼다. 정적들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비상식적인 행위들로 성직자들의 배를 불린 역사를 갖고 있다.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담고 있는 역사가 아니더라도, 과학의 발전은 종교의 입지를 점차 약화시켰다. 17세기, 18세기를 거치면서 가톨릭의 위상과 필요는 줄어들었다. 신이 없어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등의 문제가 없어진 사회가 도래했다.
 그 때 만약 가톨릭이 전통'만'을 고집했다면, 과거에 있었던 수 많은 종교들처럼 괴멸 수준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가톨릭은 그동안의 잘못들과 특유의 보수성을 혁신해야 '사회와 함께 설 수 있는 종교'가 될 수 있다고 자각했다. 교회법들을 다듬고, 과학을 인정했다. '꼰대스러운' 가톨릭만의 관습들과 계층주의를 점차 타파시켜 나갔다. 현대 가톨릭의 모습은 1960년대에 진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확고하게 갖춰졌다.

 가톨릭, 곧 천주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신앙 중 하나일 뿐이다. 신앙에 '과학'과 '합리'가 존재할 순 없다. 하지만 가톨릭은 인류 역사에 저지른 죄들을 면전에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비록 '신앙'이지만 '합리'라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현대 가톨릭의 모습이 매우 상식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화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역사적 잘못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스스로 혁신을 꾀했기 때문이라고 평한다.
 사회 위에 군림하던 가톨릭이라는 종교는 이제 그 경솔함과 자만심을 아예 내던지고 위치를 인정했다. 한때 왕정과 교황권이 세력다툼을 벌이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의 가톨릭은 지역별, 국가별 상황에 맞춰 현지화된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회와 함께 움직이지 못하는 신앙은 어떤 인류도 구원하지 못함을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가톨릭은 일원화된 시스템을 매우 견고하게 유지한다. '순명'이다. 사제들은 주교에게 순명하고, 주교들은 교황에게 순명한다. 교황은 교리와 성경과 규범에 순명한다. 획일화된 교권은 여전히 가톨릭의 보수성을 증명하지만, 한편으로 종교 내에서 교리적 다툼이 일어나는 상황을 억지한다.

 나는 천주교인이다. 이렇게 주절주절 설명한 가톨릭의 환골탈태와 합리성 구축은 '신앙'이라는 것에 비효율적일 정도로 견고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19사태를 통해 가톨릭이 한 세기 이상동안 구축해온 체계성이 결코 기우가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한국 사회에서 미사 중단이 선언되고 성직자들은 '순명'했다. 어떤 성당도 "우린 그래도 미사를 진행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천주교가 가진 특수성이기도 하다. 미사가 중단되고 성직자들은 훨씬 바빠졌다. 미사를 영상으로 제공하기 위해 해보지 않았던 일들 -이를테면 영상편집이라던지-을 했다. 또한 재개될 미사를 대비해서 다시 공고한 시스템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사가 재개됐다. 코로나19 사태가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단은 더욱 조심스러워 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성당은 사뭇 달라있었다. 바코드가 인쇄된 명찰을 나눠줬다. 노약자인 신자들은 미사 참례를 자제하라는 권고가 내려졌다. 성당 입구에서는 열을 재고, 손 소독제를 뿌려준다. 성전을 들어가면 지정된 자리에만 떨어져서 앉을 수 있다. 사제는 마스크를 끼고 있고, 당연히 신자들도 끼고 있다. 미사 중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는 복도에 그어진 선에 맞춰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움직인다. 미사 중 부르던 노래(성가)는 모두 부르지 않는다.
 이렇게 미사의 형태는 기존 천주교에서 "이건 꼭 있어야 돼"라고 했던 것들조차 과감히 줄여져 있었다. 가령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입을 가리고 있는다는 건 천주교의 기존 관습에서는 이해되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성가를 부르지 않는 모습도 미사의 웅장함을 저해할 요소여서 지양되었었지만 과감히 없앴다. 성체분배때는 "아멘"이라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아예 사람간 가까운 거리에서는 기도조차 속으로 하도록 정해졌다.
 종교의 밖에 있는 사람들이 봤을땐 별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질지 모른다. 기존에도 허례허식으로 보여졌을 일이다. 하지만 미사를 중단했던 결정부터가 신앙이나 교리적으로 봤을 때, 신자들에게는 어마어마하게 놀라운 일이었다. 한국전쟁 중에도 미사는 진행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이다.

 우리는 신을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신앙은 비현실적이고 비효율적이며 비합리적이다. 그것이 2000년을 훌쩍넘은 현대의 종교에 대한 시선이다. 천주교는 이 시선을 반박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비현실'적이고 '비효율'적이며 '비합리'적인 종교에 '현실'과 '효율'과 '합리'를 담아 신자들의 믿음을 받쳐줄 수 있는지 고민해왔다. 천주교는 사람을 따르기로 했다. '사람'들이 지금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사람'들이 지금 걱정하는 것,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이제 천주교는 강론시간에 '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신'이 걱정하는 것, '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얘기하는 시간보다 '사람'에 대한 얘기가 많다.
 종교가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추상적이었던 종교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현실과 합리와 효율을 종교가 먼저 챙기면서도 믿는자들의 믿음을 탄탄하게 다져갔다. 이렇게 오기까지 매우 긴 시간이 걸렸다. 코로나19사태에 대한 천주교의 발빠른 대응은 종교임에도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과감하게 행동하고, '사람'의 안전이 '교리'보다 중요함을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 천년 동안 권력을 향해, 명예를 향해, 재물과 토지를 향해 돌아온 천주교는 과거의 화려함을 대부분 잃었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종교는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 천주교는 돌고 돌아서 3만원짜리 스와치 시계를 착용하는 교황의 착좌기까지 왔다. 이상하게도 교황의 권력과 사회적 영예는 천 년 전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교황을 바라보는 시선은 천주교 내외를 막론하고 긍정과 호평 일색이다.
 코로나19라는 전지구적 전쟁에 한국 천주교의 과감한 결단과 체계성이 어떤 복잡한 경영학적 셈법에 의해 가능했다고 보고 싶지 않다. 수천년을 돌고 돌아온 천주교가 비로소 성경의 어떤 말을 2020년에 걸맞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실천했다고 이해하고 싶다. 종교를 떠나서 모든 이들에게 귀감을 주는 바로 그 말 말이다.

 "이웃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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