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문학기행, 여섯번째 이야기
피로파괴라는 말이 있다. 콘크리트처럼 아주 단단한 물체라도 작은 충격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 약한 충격에도 무너지는 현상을 나타내는 용어다. 물체가 반복적으로 하중을 받으면 내부에 균열이 생기게 되고, 그 균열이 많아지면 물체의 강도가 약해져 작은 하중에도 쉽게 파괴되는 것이다.
왜, 술자리에서 종종 하는 병뚜껑 날리기 게임이 있지 않나. 병뚜껑 끝을 꼬리처럼 돌돌 말아서 서로 돌아가며 그 끝을 딱밤으로 계속 때려서 날리는 그 유서깊은 게임. 아무리 얇게 돌돌 말았다지만 쇠로 만든 병뚜껑이라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반복해서 때리다 보면,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꼬리가 툭 하고 날아가 버린다. 병뚜껑 꼬리를 떨어뜨린 자의 양 옆 두 사람은 억울한 표정으로 술을 원샷해야 하고.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피로파괴 현상처럼 적은 강도의 고통이나 상처일지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스치듯 약한 충격에도 무너질 수 있다. 다들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거다. 아침부터 일이 잘 풀리지 않는데다 하는 일마다 잔뜩 꼬이고 스트레스와 짜증이 목까지 차올라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거 같지만 잘 참고 있었는데, 바쁘게 돌아다니다 의자에 정강이라도 박으면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오는 날.
그 날은 계나에게 진짜 그런 날이었다. 하필 얇은 옷을 입고 출근했고, 감기에 걸렸고, 사무실은 너무 건조하고, 새벽에는 열과 두통이 있었고, 야간 근무조가 한 시간 늦게 퇴근하게 되어 있어서 러시아워도 못 피한 채 오전 8시 정각에 역삼역에 섰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과 지하철에 끼어 있는데, 택시 탈 엄두는 안 나고, 그래서 옆 아저씨의 숨도 들이마시고 서로 몸도 비비게 되는 상황에서, 지하철 벽 광고를 보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며 참았다. 가까스로 참아내고, 아현역에 내리니 눈도 오고, 찬 바람이 숭숭 들어오고 발바닥은 시리고 시려 무감각의 고통 수준에 이르게 되고, 아현시장 골목 시장에 들어섰을 때는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고, 너무 추워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쓰러지기 직전 겨우 집에 도착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보일러 온도 최고로 높이고 이불 속에 누워도 바닥만 따뜻하지 공기는 여전히 썰렁하고, 그 와중에 동생 예나는 헤드폰을 끼고 게임을 해도 소리가 다 들린다. 짜증이 너무 나서 울며 바라봤는데, 추위도 안 타는 동생이 장갑을 끼고 게임을 하고 있다.
자, 여기서 계나가 무너진다. 이 일을 계속 겪어야 한다면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울음 섞인 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여기서 도저히 더는 못 살겠어요.’
이쯤 되니 계나가 한국을 떠나는 게 조금은 이해가 된다. 엄청나게 큰 다툼이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연인에게 서운한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폭발하는 바람에 헤어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심지어 내가 아무리 서운해하더라도 상대방이 변하지 않을 것 같다면 백 퍼 헤어지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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