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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Oct 12. 2019

내 머릿속에 런던

무엇이 그곳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었을까

United Kingdom에서 벌어지는 United States 식의 로맨스,
포토벨로 마켓과 거리의 헌 책방.
영화 <노팅힐>에선 일상 그대로의 런던이 곧 판타지다.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가는 입구.
 9와 3/4 승강장이 있는 킹스크로스 역,
런던에서는 마법사와 머글이 함께 산다.


런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타워 브리지나 웨스터민스터 같은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찍힌 사진 한 장. 아니면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속 한 장면?

런던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런던이 주는 환상의 끝자락에 푹 빠져보고 싶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제 런던을 다녀오고 나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설렘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막상 여행을 떠나 그곳에 가 있더라도, 여행의 부산함에 지쳐 여행 전에 가졌던 풋풋한 환상은 온대 간데 없이 쉬이 사라져 버리는 법이다. 길을 찾고 티켓을 끈고 우왕좌왕하다 보면 떠나기 전에 꿈꾸던 그곳에 와 있음에도 금방 지쳐 피곤해지곤 한다. 어쩌면 여행이 선사하는 가장 달콤한 시간은 떠나기 직전, 온갖 환상 속을 허우적거리고 있는 때인지도 모른다.


왕년에 잘 나가던 두 배우,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가 나오는 영화 <노팅힐>. 지금은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이 되어버렸지만 20년 전, 내가 결혼도 하기 전에 그 옛날엔, 이 영화를 보며 마음 설레지 않은 여대생은 드물정도로 휴 그랜트는 영국 훈남의 대명사였다. 영국 여행을 준비한답시고 나는 쉐도잉, 그러니까 영미권 배우의 악센트를 흉내 내며 영어 스피킹 연습을 시작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배우가 주고받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감정 이입을 하다 보니 마치 내 입에서 영국식 영어가 술술 나올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런던에 가기 몇 달 전부터 영화 <노팅힐>에 푹 빠져 장면 돌려보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명장면을 한 컷 돌려보자면, 노팅힐에 있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 책방 주인 휴 그랜트는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 줄리아 로버츠를 보고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즉시한다. 쓸쓸하게 포토벨로 마켓의 거리를 걷고 또 걷는 영화 속 그 장면.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그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사그라들지 않고. 이 남자의 감정은 그대로 노래가 되어 흘러나온다. 이때 흐르는 BGM이 Ain't no sunshine.



"Any time she goes away"라는 가사와 북적이는 포토벨로 마켓의 분위기, 한 여인을 그리워하는 배경 속 한 남자의 텅 빈 마음이 대조적이면서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영화 속 장면이 벌써 20년 전 모습이잖아! 지금 런던은 많이 다르겠지?  휴 그랜트가 쓸쓸하게 거닐던 영화 속 포토벨로 마켓의 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궁금증이 더해지며 영화의 같은 장면을 반복하는 일이 꽤 할만한 것처럼 느껴졌었다.


언어를 익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름 아닌 매일 듣고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지루한 반복을 계속이어나갈 수 있을까? 사실 영어 말하기 실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이 부분이 가장 관건일지도 모른다. 영화 스크립트를 낭독하건 쉐도잉을 하건 재미와 흥미를 잃지 않는다면 지속가능할 테니 말이다. 1년 또는 2년? 계속 연습하기만 하면 머릿속에선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고 문장을 만드는 능력이 생긴다. 어느 순간 오토메틱으로 상황에 맞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단계에 이를수 있다. 영국에 간다는 기대감으로 이 여세를 몰아 지지부진한 내 스피킹 실력을 업그레이드해보고자 하는 심산이었는데, 기분만큼은 벌써 원어민과 말을 튼듯하다.


런던 여행을 앞두고 아이에게는 영화 <해리포터>를 틀어주기 시작했다. 1편 <마법사의 돌>부터, 한 편씩 슬쩍 그리고 넌지시 던져줬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들은 9와 3/4 승강장에서 출발한 해리포터와 친구들의 이야기에 금세 빨려 들어갔다.



'어떻게 호그와트 마법학교 가겠다고 9와 3/4 승강장으로 뛰어드는 해리포터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 키득키득...... '

엄마의 흑주술 인지도 모르고 아이는  <해리포터>로 원서를 읽을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있었다.

'이런 작전을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아들아,  깊이 더 깊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거라.'

'빠져나오지 않아도 괜찮아. 온갖 환상과 마법 속에서 영어로(!) 허우적 되렴.'

영화 두 편을 가지고 놀며 나는 좀처럼 늘지 않는 영어와 아웅다웅하며 여행을 준비했었다. 영국에 가면 애인이라도 만날 사람처럼 여행 가기 전 기대에 부풀어 지루한지 모르고 스크립트를 읽고 또 읽고 장면을 돌려보고 또 봤다.


일주일에 한 번씩 프리토킹 수업에서 만나는 나의 영어 선생님, Kim은 영국 사람이다. 나의 런던 여행 계획을 알고 있던 그녀는 우리의 수업에서 런던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팁을 알려 주곤 했다. 테스코나 세인즈 버리에 가서 스콘 위에 얹어 먹을 클로티드 크림은 어떤 것을 사야 좋은지? 또는 공짜로 영어 가이드를 들으며 런던 투어를 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보통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이었다. 할머니 선생님 Kim은 그녀의 패션 아이콘이 영국의 여왕이라며 퀀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버킹검 궁전에 갔을 때 그곳에 깃발이 올라가 있다면 여왕이 궁전에 있다는 표시라며 아마도 시간을 잘 맞춘다면 여왕이 티를 마시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나마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말해줬다. 나는 여왕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영국 사람의 런던 이야기는 내 귀를 쫑긋 하게 만들었다.

 

영국을 향해 떠날 날짜가 다가 올 수록 런던에 대한 환상에 덧셈을 해댔다. 1년 중 두세 달을 제외하곤 항상 우중충하다는 런던, 우울한 런던의 하늘은 어떤 느낌일까? 언젠가 셜록 홈스에서 정말 짙은 스모그가 낀 런던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이런 침울한 분위기가 런던의 하늘이겠구나! 하며 그려보기도 했고. 잿빛이 감도는 하늘 아래에서 버버리 트렌치코트 깃을 세운 무표정한 런더너들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시크한 사람들로 가득 찬 차가운 도시일 거라, 삭막하기 그지없을 거라, 내 멋대로 추측하기 일색이었다. 작년 겨울에 한국인 유학생이 런던 거리에서 인종 차별적 폭행을 당한 사건으로 논란이 일었던 것을 회상하며 언제가 읽은 나스메 소세키의 책, <나의 개인주의>에서 그가 유학생 시절 느낀 감정이 적힌 부분을 뒤적여 보기도 했다.


  런던에 살며 생활한 2년은 가장 불쾌한 시간이었다. 나는 영국 신사들 사이에서 늑대 무리에 낀 한

  마리  삽살개처럼 애처롭게 생활했다. 런던의 인구는 500만이라고 한다. 500만의 기름 속에서 한

  방울의  물이 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나의 당시 상태였다고 주저 없이 단언할 수 있다.

                                                                                                           <같은 책 32쪽>


100년 전쯤, 일본의 국민 작가 나스메 소세키는 국비 장학생으로 런던에 유학을 갔다. 당시 그가 느낀 런던의 느낌은 '불쾌감'이라고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밝혔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며 서양문화를 한참 모방하던 일본이 영국의 산업 혁명을 따라가려 박차를 가하던 시절, 나스메 소세끼는 개발도상국가의 신민으로 세계 1등국인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유학 중이었다. 자신의 신세를 500만의 기름 속에 도저히 섞이지 못하는 하나의 물방울이라고 비유한 것처럼 그는 런던에서 얼마나 자신이 소외되고 있었는지 고백했다. 월등한 물질문명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뒤처졌다고 여겨지는 나라의 사람이 느낄 수밖에 없는 강요된 열등감. 아마도 그는 이런 강요된 열등감을 홀로 희석시키느라 학교도 가지 않고 하숙방에서 책을 사들여 독학을 고수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서양과 동양은 문화와 전통이 극적으로 다른데 무작정 서양의 것이 좋다며 배워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당시 분위기로 홍수 같이 밀려드는 서양 문화 속에서 그는 남들이 다 좋다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이것을 어떻게 내 식으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연구한 사람이었다. 작은 체구에 허름한 차림으로 이방인이 되어 웨스트민스터를 배회했을 나스메 소세키를 그려보면, 영국의 말쑥한 신사들 사이에서 볼품없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보였을지 가늠이 간다. 10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훤칠한 백인들 사이에서 동양인을 차별하지 않았다 해도 차별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그리 별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내가 지금 유럽 대륙 언저리에 살고 있어서 일까? 한국 사람으로 외국에 살아가면서 자꾸 나의 정체성을 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목조건물만 보고 산 사람들은 거대한 돌을 쪼개서 만들 건축물을 보면 그 으리으리한 모습에 입이 떡 벌어지고 위화감 마저 든다. 내 머릿속에 런던 또한 반듯하게 싸아 올린 돌덩이와 화려한 대리석 기둥, 뾰족한 첨탑이 어우러진 휘향 찬란한 건축물의 집합이었다.



산업혁명을 꽃피운 자본주의의 발상지답게 세계 금융의 중심이었던 런던. 한 때는 전 세계를 한 손에 틀어쥐었던 이 곳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고 그 땅에 빨대를 꽂아 빨아들인 부를 토대로 번영을 누린 영국의 수도이다. 런던에는 여왕의 궁전뿐만 아니라 웅장한 석조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한 때 식민지를 겪기도 했던 나라 사람인 내가 제국주의의 전리품으로 갑칠을 한 나라의 세련된 풍광을 보고 입을 떡 벌리고 그저 멋있다고 감탄하기는 싫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냥 심통일까?  누구나 영국 여행을 간다면 대영 박물관은 가게 될 것이다. 대영 박물관 안에서 손꼽히는 곳은 정작 그리스에서 볼 수 없는 파르테논 신전의 전면 기둥이다. 몽땅 뽑아다가 대영박물관을 장식했다.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 있어야 하는 스핑크스도 이집트에는 없고 대영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다. 남의 나라의 가장 귀중한 문화유산을 통째로 가져다 놓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어떤 기분이 들어야 할까? 한국에 살 때는 그리 신경도 안 쓰던 별별 공상이 계속 이어졌다. 영화에서 비롯된 런던의 로맨틱한 환상을 가지고 서양 제국주의의 어두운 면모까지 들춰내고 나니, 이건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줏대 없이 어정쩡하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 요상한 감정이 뒤섞여 나의 런던에 대한 이미지는 이미 변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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