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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y 06. 2020

코로나 19, 공포의 사이렌

이스탄불에서 마흔 


하루에 열 번쯤 울릴까?
쏜살같이 지나가는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에
나는 멈칫한다


뉴욕을 방불케 하는 이스탄불 COVID 19

뉴욕이 코로나로 전쟁통이라지만, 터키 이스탄불도 못지않다. 한국이 세계 30위권 밖으로 밀려나는 동안 터키는 하루가 다르게 코로나 19 확진자 기록을 경신했다. 독일, 프랑스, 러시아 같은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재 세계 10위권 내를 유지하고 있다. 터키에 코로나 확진자는 12만 7천 명이 넘었고 그중 80% 이상의 확진자가 이스탄불에서 발생했다. 이스탄불 전역에서 코로나 19 확진자가 없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바이러스는 도시 곳곳을 점령했다. 현재까지 터키 코로나 19 확진자 12만 7천 명 중 6만 6천 명 정도가 회복되었고 6만 1천 명 정도는 아직도 코로나 19  감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스탄불의 코로나 19 확진자 분포도

일찍이 터키 정부는 마트와 약국을 제외한 모든 상점, 식당, 쇼핑몰까지 lockdown조치를 취했다. 당국의 휴교령과 재택근무 명령으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어른들은 회사에 가지 않는다. 어린이와 노인은 외출 금지 상태이고 주말에는 어른까지도 외출 금지이기 때문에 가족들은 꼼짝 않고 집에서 휴일을 보낸다.

이런 사회적 고립 상태에서 버틴 지 벌써 7주가 넘었다. lockdown조치로 일자리가 위태로워진 사람들은 코로나 19 전염을 우려하기보다 생계를 더 걱정해야 할 판이다. 주변국인 시리아와 아프간의 난민을 받아주며 유럽의 방패 역할을 해온 터키에선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는 극빈층이 존재한다. 판자촌 같은 빈민층 거주 지역에서 사는 이들의 참담함은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생계 걱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나가서 친구들과 뛰어놀 수 없고 낮동안 컴퓨터 앞에서 수업을 해야 한다. 어른도 가족 외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기 힘들다. 대부분의 바깥 활동을 차단하고 강도 높은 사회적 고립 상태가 계속될수록 사람들은 외로움, 무료함,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제어해야 하고 스스로 알아서 활력을 찾아낼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느슨해진 나의 루틴

아들은 온라인 화상 수업으로, 남편의 회사는 재택근무로 전환되었다. 한국의 본사와 연락을 담당하며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남편은 책임감 때문인지 매일 혼자만 출근을 하고 있다. 급한 전화나 본사와 소통하는 업무만 남았을 뿐, 무역업에 종사하는 남편의 일은 국경이 봉쇄되면서 대부분 중단된 상황이다. 

사람이나 사물이 어디로 가거나 오는 물리적인 움직임이 거의 없으니, 일상의 루틴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나는 해가 뜰 때쯤,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 아들에게 아침밥을 먹여 온라인 수업을 하도록 도와주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해가 중천에 뜨면  점심을 먹고 30분 정도 산책로를 걷다가 온다. 아들은 다시 오후 수업을 하고 나는 살림을 하거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느새 남편이 올 시간이 되고 해가 질 때쯤 저녁을 먹고 여가 시간을 보내다 잠자리에 든다. 해시계와 배꼽시계에 맞추어진 일상의 루틴은 이렇게 반복되고 있다. 특별할 게 있다면 집밥 메뉴인데, 삼시 세 끼 밥이 주는 즐거움이 크다 보니, 본의가 아니게 프로 집밥러 흉내를 내게 된다.


타인은 되도록 멀리

일상 속에서 코로나 19를 의식하는 상황을 찾아보면, 주로 우리 가족이 아닌 타인을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날, 낯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때,

점심식사 후 산책로를 걷다 내 주변으로 누군가가 스쳐 지나갈 때,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이웃 사람과 말소리를 웅얼거리며 불편한 인사를 주고받을 때,

주변에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아들부터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다가오는 낯선 사람과 거리를 넓혀 갔다.


집 밖은 위험해! 코로나 19가 점령한 세상

하루에 한 번 그날 모인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 나는 공동쓰레기 장에서 절대 숨을 쉬지 않는다.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큰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속으로는 10초를 센다. 쓰레기장에서 숨을 들이마셨다가는 공기 중의 바이러스가 호흡을 통해 폐로 들어올 것만 같다. 10초 후 빠른 걸음으로 쓰레기장을 벗어나고 나서야 큰 숨을 들이켠다. 집 밖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이든 현관 문고리든 손 끝으로 무엇인가를 만지고 나면, 마치 나는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내 몸에 들러붙은 것 같은 찜찜함에 견딜 수가 없다. 

일단 집 문 밖을 나서는 순간, 세상을 점령한 코로나 19 감염에 대한 걱정이 떨쳐지지 않는다. 숨 쉬는 것, 만지는 것, 보이는 것, 모든 감각은 내 의사와 상관이 없다. 숨은 잠시 참을 수는 있지만 안 쉴 수는 없다. 보고 싶지 않아도 누군가가 앞에 있고,  만지고 싶지 않아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문고리를 잡아야만 집 밖을 나갈 수 있다. 집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나는 절실히 느낀다. 1920년대 스페인 독감 이후 100년 만에 우리를 찾아온 바이러스의 공포를,  COVID 19가 덮친 세상에 살고 있는 나를.


집 안으로 들리는 공포의 사이렌

이스탄불에서 우리 집은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장소다. 집에 있을 때 나는 코로나 19 팬데믹 이전과 그리 다르지 않게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집 앞에 큰 도로에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집안에 들려오는 순간 나는 멈칫한다.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지 않았지만 내가 사는 이스탄불에서 일어나고 있는 처참한 광경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구급차가 고속도로를 거칠게 가로지르며 외치는 비명 같은 사이렌. 화살처럼 쏜살같이 지나가는 소리는 매우 긴급하고, 절박하게 들린다. 상점과 식당, 학교와 대부분의 시설이 닫힌 거리에서, 적막을 뚫고 나를 먹먹하게 만드는 공포의 사이렌 소리는 하루에 10번쯤 들려온다. 이 소리는 정말 너무 강력해서 내가 사실상 경험할 수없지만 실제 할 것만 같은 이스탄불의 현실을 상상하게 만든다. 


'저 앰뷸런스에 타고 있는 사람은 코로나 19 감염자겠지, 어느 병원으로 가고 있을까?'

'저 사람이 가고 있는 병원에는 엄청난 숫자의 코로나 19 확진자가 고통에 신음하고 있겠지!'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가장 가까이에서 일하고 있는 의료진은 얼마나 두려울까?'


공포(Metus)는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불확실하게 여기는 미래나 과거의 대한 관념으로부터 생겨나는 불안정한 슬픔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정서들에 대한 정의 13>


요즘 이스탄불에는 봄 꽃이 만발했다. 휴일엔 외출금지 명령이 떨어지는 이곳에서 어른도 아이도 아무도 나들이를 갈 수 없다. 터키 정부는 5월까지 휴교를 연장했고 lockdown도 철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터키 코로나 확진자의 80% 이상이 살고 있는 이스탄불의 실상을 집에만 갇혀 있는 나는 알 수가 없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급박한 사이렌 소리가 나를 스쳐갈 때, 내 안에 존재하는 두려움과 불안을 잠시 응시할 수 있을 뿐이다.


별일 없이 나의 하루는 코로나 19 팬데믹 사태가 만들어 놓은 질서대로 흘러가고 있다. 타인을 경계하는 나를 의식할 때, 숨을 쉴 때, 무엇인가를 만질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보이고 들릴 때, 우리는 외부와 연결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집 밖으로 안 나갈 수 없고 집 안에 있어도 코로나 19 감염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몸의 감각을 통해 올라오는 수동적인 감정은 늘 우리를 따라다니듯, 공포와 불안도 늘 나와 함께 하고 있지만


나는 가족을 위해 삼시 세끼를 짓고 누군가는 읽어 줄 나의 일기를 쓴다.

나의 하루의 질서를 흔드는 사이렌 소리, 

이스탄불의 현실을 일깨우는 공포의 울림 속에서,

오늘도 나는  COVID 19와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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