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끄엘륄은 『이슬람과 기독교』를 읽으며, 1980년대 유럽의 상황이 지금 우리 나라의 상황과 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한국인들은 더이상 도시의 하위 계층에 잔존하려하지 않고 있다. 일자리와 소득을 유지하려는 여성들은 결혼과 자녀 양육을 인생의 표준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있으며 더럽고 힘든 일에 종사하느니 차라리 비고용 상태를 유지하며 소비를 지양하는 삶을 선택하겠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선진국에 대열에 들어선 한국인의 삶의 가치는 달라졌다.
1980년 유럽, 그중에서도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그동안 쌓아 올린 유럽의 문명과 가치에 대해 야만스럽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돈과 일에 대한 집착, 기술의 발달에 기인한 비인간화 같은 조잡한 물질주의 같은 것이 반감을 샀다. 보편 도덕이나, 애국주의, 사회주의 같은 가치들도 더 이상 사람들에게 통용되지 않는 시점이다.
기독교는 사람들을 하나의 믿음으로 꾈 종교가 되지 못하고 이탈자가 늘어갔다. 반면 절대적인 종교, 풍성한 문명, 심오한 인본주의, 영적인 신앙심, 라마단같이 가난한 자와의 공감을 체험하게 하는 종교인 이슬람에 유럽 지식인의 관심이 모였다.
지식인들은 끝장난 가치나 영적인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무슬림들에게 보게 된 것일까?
자끄엘륄은 『이슬람과 기독교』에서 이러한 “관심”의 한 가지 이유를 1991년 프랑스에 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로 존재하는 마그레브인과 프랑스인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서방 이슬람이기도 한 마그레브인은 프랑스령에 속하는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인을 말한다. 프랑스의 위임통치 이후 유입된 마그레브인은 프랑스 경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계층이다. 그들은 프랑스인들이 더는 할 수 없는, 절대 하기를 원치 않는, 각 종 더럽고 힘든 노역에 종사하며 ‘풍요로운 프랑스 사회에서 가난한 자’ 계층으로 사회를 떠받친다.
처음에 프랑스인은 정치적 탄압과 가난으로부터 마그레브인은 구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고된 일상 노동의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자들이 무슬림인 마그레브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인 프랑스인의 마음에 호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방인을 너의 가족처럼 대하라.”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프랑스 사회에 기여하는 마그레브인들에게 더 나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열린 태도로 전환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러한 호의적 태도에 기저에 프랑스인들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제3세계에 대한 미안함 감정 같은 것이 아닐까?
유럽의 경제적 도약에는 싼 원자재의 공급과 산업 생산물의 소비국으로 착취당한 식민지 국가들의 이바지가 중요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느끼는 떳떳하지 못한 양심은 마그레브인에 대한 공감으로 표현됐던 것이다. 이런 공감은 식민지 개척자로 서구 열강으로 대변되는 프랑스가 가장 강력한 근대 국가의 위상을 떨칠 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일이기도 했다.
사실 세계의 패권에서 유럽이 미국에 밀려난 이후미국과 아랍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만만치 않게 이슬람권을 결집할 수 있는 세력이 마르레브인이었다. 유럽내 노역을 제공하는 하위계층, 이슬람 세력,그 힘에 대해, 프랑스인의 인식의 환기가 공감으로 표출된 것은 아니었을까?
“착취당하는 단순 노동력인 마그레브인들을 향한 선의, 과거에 대한 서구의 떳떳하지 못한 양심, 새로운 힘에 대한 존중과 같은 그 모든 것은 결합하는데, 그것은 아랍의 현상에 대한 주의를 집중시키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에 관계되고 이 종교에도 물론 관계되는 관심인 동시에, 우리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아랍인들 자신 가운데 이 종교의 비타협성 속에서 다시 생겨나는 관심이다. 따라서 이것은 전 세계적 사실이자 더 특별한 사실이며, 이 종교에 대해 집착하는 경향이다.” <같은 책, 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