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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May 27. 2018

<N을 위하여>가 시작되는 섬

일본 가가와현 쇼도시마에서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 
모두가 가장 소중한 사람만을 생각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가장 상처 입지 않을 방법을 생각했다.
- <N을 위하여> 중에서 


  

크리스마스 이브. 도쿄의 초고층 호화 맨션에서 회사원 노구치와 그의 아내 나오코가 살해된다. 현장에는 네 명의 젊은이가 더 있었다. 모두가 이름에 N을 이니셜로 갖는 사람들.


남편과 나는 <N을 위하여>라는 일본드라마를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다. 언젠가 시코쿠 여행을 하게 된다면 드라마가 시작되는 배경 쇼도시마를 제일 먼저 가볼 계획이었다. 그래서 오카야마 공항에서 내려 차를 렌트하자마자 망설일 필요도 없이 달려간 곳은 쇼도시마로 가는 배가 있는 항구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배를 타고 쇼도시마까지 간다. <N을 위하여>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 섬에서 우리의 여행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늘 그랬듯 마음만 앞선 탓에 시간 계산을 실패하고 말았다. 항구에 도착하니 배가 부웅 소리를 내며 떠나가고 있었다. 다음 페리는 1시간 40분 뒤에나 출발할 예정이란다. 오카야마 시내에 가서 점심이나 먹고 돌아올까하다가 페리 매표소 바로 옆에 있던 간이식당의 우동냄새가 좋아서 그걸 점심으로 삼기로 했다. 물론 아직 오카야마. 우동현이라 불리는 가가와현에 닿지 못했지만.



<N을 위하여>의 주인공 스기시타 노조미는 세토내해에 있는 섬에서 태어났다. 부잣집딸인 엄마와 능력 있는 아빠 사이에서 어려움 없이 성장한다. 어느날 아빠가 젊은 여자를 집으로 데려오기 전까진. 아빠는 갑자기 ‘우리 집안은 수명이 짧으니 이제부터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선언한 후 노조미와 남동생, 그리고 엄마를 집에서 내쫓아 버렸다. 바닷가에 위치한 하얗고 넓은 집에 살던 노조미는 산중턱에 위치한, ‘유령의 집’이라 불리는 허름한 집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런 시기 노조미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눈 친구가 있었다. 나루세 신지. 둘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정자에서 장기를 두거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쇼도시마에 도착하자마자 그 정자를 찾아갔다.


드라마에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닷풍경이 내려다 보이던 그곳은 실제로도 근사했다. 흐린 날씨가 아쉬웠지만,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둥근 만 뒤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이 살갑고, 바다 위에 드문드문 놓인 섬들이 앙증맞다. 이렇게 좋은 풍경을 매일같이 마주할 수 있었음에도 노조미는 늘 ‘수평선이 보고 싶다’고 말한다. 섬이 떠 있어 갇혀있는 느낌을 주지 않는 바다가 보고 싶다고. 이미 이 풍경도 충분한데. 


  

처음 그 자리를 배치 받았을 땐 적잖이 당황했다. 옆 자리 할아버지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는데 옷과 메고 있던 가방이 음식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입에서는 뭔가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식사할 기분이 싹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되도록 그 쪽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하지만 조금만 몸을 부주의하게 움직이면 어깨가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조식을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한참 가방을 뒤적거렸는데 나는 그 가방에 한가득 붙어있던 음식부스러기인지 할아버지 입에서 나온 음식물인지 모를 것들이 우리 쪽에 떨어질까 전전긍긍했다. 가방에서 무언가를 겨우 꺼낸 후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우리 테이블에 불쑥 테블릿화면이 끼어들었다. 할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 질문을 써서 내민 것이다. 굉장히 흘려 쓴 일본어는 읽기 어려웠고, 중간 중간 ‘젊은이’, ‘쇼도시마’란 한자 정도가 눈에 들어왔다. 함께 있던 할머니께 조금 읽기 어려운데 어떤 말이 쓰였는지 여쭙자, “으음 어떤 부분을 모르겠어요?”라며 되물었다. 전체적으로 다 읽어달라는 것도 죄송스럽고 또 우리가 할아버지의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재빨리 신분(?)을 밝혔다.


"저흰 한국인이라 일본어를 아주 잘 구사하진 못합니다."


할아버지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으려하던 할머니는 그제서야 “이 친구들에게는 무리야”라고 다정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나서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식사는 계속되었다. 할아버지가 기침을 할 때마다 할머니는 "에고고. 입을 다물고!"라며 주의를 주었지만 할머니의 호들갑에 신이 난 할아버지는 입을 벌려서 음식물을 더 내보이며 낄낄 웃었다. 할머니는 “아흐흐흐흐. 달걀 떨어진다 떨어진다!!!” 소리를 지르면서도 닦아주진 않고 웃고만 있다. “아무래도 앞치마를 사야겠어. 앞치마를 사자.”



우리가 식사를 마칠 때쯤 할아버지의 오른쪽 테이블에는 간난아이를 안은 엄마가 와서 앉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를 쳐다보자 아이가 방긋 웃었다. 아이는 턱받이를 예쁘게 하고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의 모습과 간난아이의 모습을 함께 두고 보니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시간 감각이 뒤죽박죽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N을 위하여>에도 점점 아이처럼 변해가는 엄마가 등장한다. 아빠에게 갑자기 쫓겨난 엄마는 아빠가 자신을 다시 데리러 왔을 때 못생기게 하고 있으면 안된다면서 고가의 화장품과 옷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아빠가 매월 주는 생활비를 다써버리고, 신용카드까지 만들어가며. 노조미는 아이처럼 생떼를 쓰는 엄마를 어르고 달래며 점점 지쳐간다. 


남쪽으로 난 커다란 창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렇다는 것을, 그곳에서 쫓겨난 후에야 알았다. 조금만 섬이 올록볼록 떠 있는 청록색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내게는 호흡이나 다름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숨을 쉴 수 없게 돼 버린 나는 조금 망가졌다.

- <N을 위하여> 중에서 



하얀 궁전에서 쫓겨난 셋이 살던 집을 찾아가 보았다. 앞서 본 항구 주변 어촌 마을과는 사뭇 다른 산촌 풍경이 펼쳐 있었는데, 노조미가 살았던 집처럼 곧 쓰러질 듯한 집은 발견하지 못했다. 마을 풍경은 마치 청산도 구들장논을  떠올리게 했다. 노조미는 엄마가 또 다시 생활비로 사치를 부릴까봐 생활비가 입금되자 마자 마트에 가서 식료품을 왕창 산다. 그러나 그 많은 식료품을 혼자 들고 올라가기에 버거운 위치에 있는 집. 나루세의 도움을 받는다. 실제로 마을에 난 길들의 경사가 엄청나서 드라마 속 장면에 현실감이 더해졌다.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미나토 가나에가 쓴 원작을 사다 읽었다. 영상을 먼저 만나고 글을 읽으면 인물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움직이며 표정을 짓기 때문에 방해가 되곤 하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드라마 속 인물들의 표정을 보며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몇 번이고 갸웃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는 주인공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그들의 표정과 속마음이 자연스레 겹쳐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 반가운 문장을 만났다. 드라마에서는 안도와 스기시타 노조미가 노구치 부부에게 접근하기 위해 스쿠버 다이빙을 하러 가는 장소가 ‘오키나와’라고만 언급되는데, 소설에선 오키나와 ‘이시가키 섬’으로 나온다. 몇해전 다녀온 이시가키는 바다빛이 맑고 깨끗한 아름다운 섬이었고 사람이 굉장히 적었다. 오키나와 본섬이 아닌 이 배경에 서 있는 네 명이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니까.



그나저나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싶었던 것일까. '할머니에게 도움을 받아서 이야기를 나눠볼걸.'  쇼도시마를 나오는 배에서부터 든 후회는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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