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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May 20. 2018

눈부시게 찬란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아무도 모른다> 배경 여행, 도쿄


충격적인 것은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란 사실이었다.  게다가 실화는 더 믿기 어려운 사실로 가득하다.  


여러 해 전에 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작년에 출간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안에서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장면을 만나서였다.  



사실 히에이(영화에서 차남 역할)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말하지 않고 찍었습니다. 우선 히에이에게 “무선 조종기로 놀고 있으렴”하고, 유야에게는 말로 대사를 가르치면서 화를 내며 무선 조종기를 걷어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히에이는 진심으로 울컥해서 “물건에 화풀이하는 거 아냐”라며 평소에 실제 어머니에게 듣는 말 그대로 유야에게 호통쳤습니다.

저는 컷을 외친 다음 히에이에게 “미안해. 멀리서 이런 장면을 찍으려고 일부러 유야한테 화내 달라고 했어”라고 설명했지만 두 아이는 한나절 동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차를 타고 돌아가는데도 둘 다 반대쪽을 보고 앉아있어서 교코 역의 아유가 어이없다는 듯 “둘 다 바보 아냐? 연기란 말이야, 연기”라고 말했던 것이 그립습니다.

-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중에서  
 



그리고 나는 이 문장들을 읽으며 영화 속 아이들이 실제로도 가깝게 지내며 촬영했다는 배경에 가볼 기회만을 노려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네 명의 남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아키라, 교코, 시게루, 유키. 그리고 넷의 엄마는 아이들을 집에 남겨두고 남자 친구와 살기 위해 집을 떠난다. 크리스마스 전에 돌아오겠단 말을 믿으며 아이들은 매일매일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지나가고, 막내 유키의 생일도 지나가고, 겨울도 끝이 나고, 봄이 오고, 더위가 찾아와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한동안은 보내주던 생활비도 받지 못하고 있다. 월세는 당연 밀려 있고 수도와 전기도 끊겼다. 돈이 없으니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하지만 장남 아키라는 보호소에 신고가 들어가 동생들과 떨어져 지내게 되는 일이 싫다.


영화 속 네 명의 아이들이 생활하는 아파트는 도쿄 나카노구에 있다. 누마부쿠로라는 고즈넉한 역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어간 곳이었는데 영화 속 모습 보단 훨씬 근사한 주거지였다. 아파트까지 걸어가는 길에 돌아본 마을 풍경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 살아 보고 싶단 마음까지 들었다. 한 줄기 하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곁 산책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영화에서 아키라가 이 길을 걷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한 번은 잠깐 집에 짐을 챙기러 온 엄마와 함께 걷는데, 그때 엄마는 ‘다시 곤란해지면 전 아빠들(아이들의 아빠가 모두 다르다)을 찾아가 돈을 꾸란’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마을엔 눈길을 끄는 으리으리한 주택도 있고, 세련된 새 맨션도 들어서 있었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 속 아파트 ©moonee


그래. 영화를 다시 떠올려보면 눈부시게 찬란한 화면들이 스쳐지나간다. 그들의 삶과 대조적으로 아이들이 있던 공간은 햇살로 가득 차있고, 여러 빛이 모여 영롱하단 인상을 준다. 어두운 줄거리 속에서 이런 찬란함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 담겨 있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접하고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어째서 장남은 동생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지 않았던 걸까요?’ 그는 남매들이 본 풍경이 비단 잿빛 ‘지옥’만은 아니었을 것이라 상상한다. 물질적인 풍요는 없어도 남매들끼리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눴고 그들만의 성장과 희망의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내가 영화 속에서 본 빛들은 감독이 의도하여 쏟아낸 모습이었던 것이다. 마침 아이들이 살았던 아파트 벽면에 내리 꽂힌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한 것처럼 무지개색을 내고 있었다.


 


아파트는 무려 1965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하는데 많이 낡아 있었지만, 지저분하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이들이 공원에서 꽃씨와 흙을 가져와서 컵라면 용기에 심은 화분이 늘어서 있던 베란다. 베란다의 육각형 모양 난간도 똑같이 붙어있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파트 담장에 입주자 모집 중이라고 쓰여있길래 월세가 얼마나 될까 찾아보았다. 한 달 9만 5천엔. 도쿄의 물가, 일본의 최저시급 등을 같이 생각해도 부담스러운 가격. 이 숫자와 영화 속 가족들의 생활은 도무지 연결 지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월세를 찾아본 덕분에 집 안 사진을 만났다. 들어 가볼 수 없었던 방 모습이 보이니, 자연스레 아이들을 하나둘 앉혀보게 된다.


월세정보 : https://www.homes.co.jp/chintai/b-1167140129631

 

아파트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아이들이 물을 받기도 하고, 빨래도 하고, 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공원이 나온다. 니시오치아이공원에는 <아무도 모른다> 속 시게루와 유키 나이 정도 되는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와 함께 따뜻한 휴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가정적인 분위기로 충만해서 영화 속 네 남매가 이곳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면 굉장한 위화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 속 계단 ©moonee
영화 <아무도 모른다> 속 공원 ©moonee

(영화 스틸컷 출처 :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40283)


공원 곁에 가파른 계단이 하나 있다. 주인공 아키라가 자주 오르내리는 계단이지만, 나는 이 계단을 실제로 보니 막내 유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이들은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계단을 올라가는 게임을 하는데, 가장 밑에 있는 유키가 정말 작아 보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만 한참 밑에 있고 위로 먼저 올라간 친구들이나 사촌들을 올려다볼 때 그 초조함. 이곳에 서 있으니 어린 시절 느꼈던 그 기분이 되살아나서 아랫배가 살짝 아파왔다.


 

영화의 배경이 된 마을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따스해서 이곳을 걸으며 몇 달째 방치된 아이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일은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고, 몰랐다고 말하는 어딘가에서 실재했던 이야기다.






<아무도 모른다> 배경 : https://goo.gl/maps/TqZFF5FxD3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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