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면 없어라>에 담긴 하와이
첫 유럽행은 출장이었다. 그때 사회인이 된 지 2년 차였던가 3년 차였던가… 유럽 출장은 굉장히 흥분되는 일이기도 했고, 또 매우 긴장하기도 했다. 긴 출장을 떠나는 나에게 남자 친구는 <눈 뜨면 없어라>라는 에세이집을 쥐어주었는데, 속으론 ‘부장님, 대리님과 함께 가는 출장에서 책을 볼 시간이 과연 있으려나’ 하며 챙겨 떠났다.
프라하까지 가는 긴 비행. 흥분과 긴장이 뒤섞여 좀처럼 잠들지 못했고, <눈 뜨면 없어라>를 펼쳤다. 그리고 그 항공길 위에서 나는 펑펑 울었다. 옆에 앉아 있는 선배가 다행히 잠들어 있었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아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회사에서 끊어준 항공권이 이코노미 중에서도 등급이 높은 자리였는지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되어 승무원들의 눈길이 자주 닿는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나의 안색을 계속 살피는 통에 마음을 달래느라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비행기에 내리고 나서도 나는 출장 일정 내내 <눈 뜨면 없어라> 속 문장들을 문득문득 떠올리며 울컥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선배들과 저녁식사에 기울이는 와인잔을 보다가도 눈물이 핑 돌았고(지금 생각하면 꽤나 오해를 샀을만하다), 스웨덴에서 노르웨이로 넘어가는 기차 안에서 다시 책을 꺼내 보다가 마음이 내려앉았다. 물론 지금 보아도 슬프고 좋은 문장이지만, 아직 사회 초년생이었던 그때 느꼈던 막막함과 불안이 덧씌워진 문장들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을 파고들었던 것 같다.
<눈 뜨면 없어라>는 작가였고, 교사였고, 기자였고, 방송인이기도 했고, 정치인이기도 한 김한길이 20대에 쓴 일기다. 그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딸 故이민아와 결혼을 하자마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그리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보낸 이야기를 <미국 일기>라는 제목으로 '문학사상'에 2년 동안 연재했다. 이 책은 그 연재 글의 모음집이다.
LA에서 보낸 김한길과 이민아의 신혼생활은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밤에는 주유소, 낮에는 햄버거 가게 쿡 헬퍼로 일하는 남편과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하는 아내. 부부가 하루에 마주치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날도 많았다. 또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 자존심의 상처를 입으며 고생하는 김한길의 모습도 애달프다.
그들이 LA를 주 배경으로 고된 (물론 중간중간 매우 사랑스러운 모습도 담겨 있다) 나날을 보내기 전 하와이에 잠깐 들르는데(아마 이를 신혼여행으로 삼은 듯했다), 이때 배경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나는 이토록 긴 서문을 쓰고 있다. <눈 뜨면 없어라>의 하와이 장면만큼은 환상적이고 아름다우며 재치 있으니까. 친구 부부와 인터내셔널 마켓에 간 김한길은 그곳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자를 쳐다보다가 미나(이민아)에게 야단을 맞는다.
“금발이 걸친 것이라고는 달랑 엉성하게 엮은 그물천 원피스 하나가 전부였다. 속이 어지간히 들여다 보였다. 우리가 전에는 무식하게 ‘빤쓰’라고 불렀고 요즘엔 고상하게 ‘팬티’라고 부르는 것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음껏 허리를 뒤틀어가며 우리 곁을 지나갔는데 내 고개가 그만 주착없이 금발이 가는 쪽으로 따라돌았던 것이다. 그래서 미나에게 꼬집힌 것이다.
저 정도면 시간당 백 달러짜리는 될 거라고 소곤대며 중식이가 쿡쿡 웃었다. 검둥이 백둥이 황둥이 …… 없는 게 없어. 호모를 상대로 하는 남창들까지 색깔별로 다 있지. 그래서 내가 중얼거렸다. 과연 ‘인터내셔널 마켓’이구나.”
- <눈 뜨면 없어라> 중에서
인터내셔널 마켓은 2016년 새단장을 했기 때문에 그가 보았을 풍경과는 사뭇 다른 곳이 되어 있었지만, 어쩌면 나는 김한길이 보았을 여자와 닮은 이를 이곳에서 마주친 듯하다. 너무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호텔을 잘못 예약하는 바람에 늦은 밤 방에서 내려가 프런트에서 환불 문의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머리카락이 이미 하얀 할아버지가 붉은 얼굴을 하고 먼저 타 있었다. 나의 슬픈 얼굴을 알아채고는 내게 “모든 것이 괜찮니? 너 괜찮은 거야?”라고 물었다. 애써 웃으며 “괜찮다”라고 답을 하곤 옆에 서있는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니 그녀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눈썹에는 가짜 속눈썹이 수북하게 붙어있고, 옷매무새가 단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인형처럼 미소만 짓고 있는 금발의 아가씨. 볼륨감이 있는 몸매라 그렇게 느꼈겠거니 했지만 방으로 돌아와 <눈뜨면 없어라>를 다시 펼쳐보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여자와 이 문장이 겹쳐졌다. 물론 새벽같이 다른 호텔로 옮겨가기 위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했던 나의 착각일 수 있지만.
나무 밑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오면 어느새 차 지붕이 온통 꽃잎으로 뒤덮여 있는 곳. 나무에 겨울이면 헐벗어 추운 거리를 더 춥게 만드는 서울거리를 플라타너스만 한 나무에 손바닥만 한 꽃들이 활짝 활짝 피어 있는 섬.
“저 끝에 보이는 게 다이아몬드 헤드라는 화산이야.”
- <눈 뜨면 없어라> 중에서
작가가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다이아몬드 헤드에 새벽부터 일어나 올라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와이키키 다운타운을 가득 채운 많은 사람들에 질려 버렸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이른 시간에도 일출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대신 전날 줄이 길어 포기했던 마루카메우동를 맛보기로 했다. 마루카메우동은 이미 시코쿠의 우동을 맛본 우리에게 그리 인상 깊은 맛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아침 일찍 이곳에 오는 이들이 한국인들뿐이란 사실이 재미있다. 부지런함 하나를 무기로 미국땅에서 단단히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눈 뜨면 없어라> 속 한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