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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Jun 03. 2018

고양이는 종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영화 《버닝》 배경여행

"가끔씩 헛간을 태운답니다." 그가 반복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손톱 끝으로 라이터의 모양을 따라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화나 연기를 힘껏 폐 속으로 빨아들여 십 초쯤 그대로 있다가 천천히 뱉어냈다. 마치 엑토플라즘처럼 연기가 그의 입에서 공중으로 떠돌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출처 : 교보문고) | 영화 <버닝> (출처 : 다음영화)


개봉하자마자 바로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이 좀처럼 없는 내가 서둘러 예매를 하고 《버닝》을 보러 간 이유는 하나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글이 영상 안에서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산책으로 즐기는 무라카미 하루키》란 책을 번역하면서 더욱 하루키 소설에 빠져 지내고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영화 《버닝》과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하루키가 그린 주인공 ‘나’와 이창동 감독이 담은 종수가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영화를 보고 실망할 것이란 생각은 섣부르다. 영화 곳곳에 무라카미 하루키 팬이라면 눈치챌 법한 수많은 소재들이 아낌없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148분의 러닝타임은 충분히 즐거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버닝》.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종수, 해미, 벤.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설가를 꿈꾸고 있는 종수(유아인)는 배달을 갔다가 어린 시절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오랜만에 만난 해미는 아프리카에 다녀오겠다며 그동안 자신의 자취방에 와서 고양이에게 밥을 주란 부탁을 하고 떠난다. 그리고 종수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는 해미를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데, 해미 곁에는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은 많은... 마치 개츠비 같은 수수께끼의 남자 벤(스티븐 연)이 서있었다. 원작 역시 ‘나’, ‘그녀’, ‘그 남자’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줄거리는 비슷하다. 다만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우고, 남자는 ‘헛간’을 태울 뿐. 


아침잠이 많은 내가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 70km 거리를 달려 도착한 곳은 파주 만우리. 종수의 집이 있는 마을로,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 보고 있다. 영화에 대해 다룬 기사를 읽다가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매직 아워(Magic Hour).” 이 ‘마법의 시간’은 해 질 녘과 동틀 녘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카메라로 들어오는 빛이 부드러워 아름다운 화면을 만들 수 있는 시간대라고 한다. 《버닝》의 절반 이상이 하루에 얼마 주어지지 않은 이 시간을 기다려 찍은 화면이라고 한다.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니 내가 이제까지 찍은 사진 중 정말 마음에 드는 하늘색이 담긴 몇 컷이 떠올랐다. (언젠가 책을 낸다면 그 색을 담은 사진이나 그림을 표지로 삼고 싶었다. 정작 《다정한 여행의 배경》의 표지를 선정할 때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해가 뜨기 전에 만우리에 도착해야 했던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매직 아워에 깔린 배경을 만나야 했다. 서두른 덕분에 만우리 근처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고양이 한 마리였는데, 총총 뛰어가는 모습이 고양이답지 않아서 청설모나 다른 동물인 줄 알았다.  


영화 <버닝> 배경여행 ©moonee
영화 <버닝> 스틸컷 (출처 : 다음영화)
영화 <버닝> 배경여행 ©moonee
영화 <버닝> 배경여행 ©moonee


 

서울에서 일을 하던 종수는 아버지가 폭행죄로 수감되어 고향인 만우리로 돌아오게 된다. 만우리는 종수와 해미가 성장한 마을이고, 해미가 어릴 때 빠졌다고 주장하는 ‘마른 우물’이 있는 곳. 해미는 우물에 빠졌는데, 종수가 발견해주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종수는 기억하지 못한다. 또 해미의 엄마와 언니도 그런 우물은 없었다고 말한다. 한편 종수가 어릴 때 집을 나간 엄마는 우물의 존재를 알고 있다. 


‘우물’, ‘동시 존재’, ‘세계의 끝’, ‘개츠비’, '고양이'와 같은 단어들은 모두 하루키 소설의 단골 소재다.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은 우물에 들어가 다른 세계를 만난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주인공은 갑자기 사라진 스미레가 우물 같은 곳에 빠졌을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경찰관은 이 동네엔 우물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또 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동시 존재’란 표현은 원작 소설에도 등장하는데 하루키가 자주 사용하는 장치다. 《1Q84》의 두 주인공 아오마메와 덴고가 1984년과 기묘하게 다른 1Q84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한편 해미가 다녀온 '세계의 끝’은 아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란 소설 제목에 담겨 있다. 그리고 종수가 벤을 보며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다”고 한 장면은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에는 주인공 와타나베에게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라고 말하는 나기사와란 인물이 등장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럴드는 하루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소설가 중 한 명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반가운 고양이! <헛간을 태우다>에는 고양이가 등장하지 않지만, 하루키 대부분의 소설 속에 고양이가 살고 있다. 


만우리 구석구석에 고양이들이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열 마리는 족히 만난 듯하다. 그중 대여섯 마리는 팔뚝만 한 새끼 고양이였는데 얼마 전에 다 같이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모두들 해미의 고양이처럼 수줍음이 굉장히 많아서 가까이 가기만 해도 재빨리 도망가버리거나 아이처럼 울어댔다. 이곳에는 고양이 말고도 다양한 동물들이 살고 있다. 매직 아워가 시작됨을 알리는 듯  “꼬끼오 꼬꼬 꼬꼬” 우는 닭들부터, 작은 발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개들. 아침이 온 것이 너무나 신나 견딜 수 없어 보이는 새들의 지저귐. 이런 소란 속에서도 외양간에 있는 젖소들은 잠이 덜 깼는지 멍하니 앉아 있다.  


아직 어두운 마을. 사늘한 아침 공기가 이상한 긴장감을 가져왔다. 서울 일상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닭이 우는 소리를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로 착각한 나의 어깨 근육이 순간적으로 쪼그라들었다. 아무래도 계속해서 머릿속에 《버닝》를 두고 있는 탓인 듯했다. 


 

영화 <버닝> 배경여행 ©moonee
영화 <버닝> 배경여행 ©moonee
영화 <버닝> 배경여행 ©moonee
영화 <버닝> 스틸컷 (출처 : 다음영화)


영화에 담긴 종수의 집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영화를 위해 임시로 벽을 세우고 창문을 붙여 촬영을 했는지 주변에 떼어낸 창문과 문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종수가 벤의 차를 맞이하는, 또 해미가 석양빛 아래서 춤을 추던, 그리고 셋이 나란히 앉아 대마초를 피우던 마당은 그대로 있어 그 위에 서서 여러 장면들을 되새김질했다. 집 앞에는 양귀비가 몇 송이 피어 있었는데 물론 아편이 나지 않는 개양귀비겠지만 이 공간에 피어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주인공들이 대마초를 나눠 핀 공간에 핀 아편꽃을 보며 생각한다. 함께 대마초를 피는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소설에서는 마리화나가 주인공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져다주는데, 그렇다면 ‘대마초’는 회상의 상징일까. ‘우물’은 실재할까. 벤은 진짜로 종수 집 근처의 ‘비닐하우스’를 태웠나.  


여러 질문들과 함께 종수의 집을 빠져나와 ‘비닐하우스’는 ‘여자’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남편과 마을의 비닐하우스를 찾아 돌아다녔다. 태우고 달아나도 문제가 되지 않을 법한 비닐하우스는 없다. 종수 역시 벤이 깨끗이 태웠다고 하는 비닐하우스를 찾지 못했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해미도 찾을 수 없다. 또 밥을 주러 간 해미의 방에서 한 번도 고양이를 만나지 못했다. 해미의 고양이 ‘보일’은 존재하는가? 


종수가 사는 마을에 가보니 고양이는 종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것도 여러 마리나. 



영화 <버닝> 배경여행 ©moonee
영화 <버닝> 배경여행 ©moonee
영화 <버닝> 배경여행 ©moon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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