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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May 07. 2018

일요일 오후 따스한 햇살 아래에선 모두들 행복해 보였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속 도쿄 산책

아카시아와 밤나무 꽃향기가 은은하게 나는 일요일 봄날. 나오코와 와타나베가 걸어간 길을 똑같이 걷고 또 걸었다. 우리의 간격도 1미터 떨어져 있다. 두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산책이라고 하기에는 나오코의 발걸음이 너무 빠르고 진지했다. 그녀는 이다바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오보리바타를 나서서 진보초 교차로를 건너 오차노미즈 언덕을 올라 그대로 혼고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전철 노선을 따라 고마고메까지 걸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다 걷고 나니 둘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걸을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보도가 끊김이 없이 주욱 연결되어 있다. 일단 걷기 시작하면 어디에서 그만두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좀처럼 멈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은 나의 상상으로부터 꽤 비껴가 있었고, 고마고메에 도착하니 정말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소설 속 문장과 같이.



《노르웨이의 숲》배경여행 - 요쓰야역 ©moonee
《노르웨이의 숲》배경여행  ©moonee
《노르웨이의 숲》배경여행  ©moonee


산책의 시작. 아주 사소한 다툼이 나와 남편의 간격을 자연스레 1미터 정도 벌렸다.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 나오코는 도쿄 주오선(도쿄역에서 나고야역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에서 와타나베를 우연히 만나 함께 걷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1미터를 앞서 걷기 시작했다. 소설을 읽을 땐 복작대는 도쿄 풍경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탓인지 둘이 걸은 길이 좁고 조금 위험한, 회색빛이 감도는 길이라 상상했다. 그래서 요쓰야역에서 내려 제방을 따라 걷는 길을 만나자마자 굉장히 놀랐다. 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는 산뜻한 산책로였고 초록빛(일본어로 미도리!)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도심에 이런 길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잘 가꾸어져 있고, 길 양 옆엔 대학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산책로 중간중간 놓인 벤치엔 홀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프로 수준급의 기타를 연주하는 서양인 아저씨도 만났다. 봄바람이 상쾌해 연주할 맛이 나는 듯했다. 아이를 데리고 산책 나온 젊은 부부도 많았다. 아빠가 아이를 향해 내뿜는 비눗방울을 봄빛이 감싸고, 그 방울방울 사이를 걷는 아이의 모습은 몽환적이다. 하루키의 문장처럼 ‘일요일 오후의 따스한 햇살 아래에선 모두들 행복해 보였다.’   


 


이 길이 하나의 배경이 된 《노르웨이의 숲》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7년에 발표한 연애소설이다. 주인공은 37세의 와타나베 도오루. 그는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는 보잉 747기 안에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듣게 되며 19살 때를 회상한다. 19살의 와타나베 곁에는 자살한 친구의 여자친구였던 나오코와 ‘마치 봄을 맞이해 막 세상으로 튀어나온 작은 동물처럼 신선한 생명력을 뿜어내던’ 미도리가 있었다. 나오코는 옛 연인 기즈키의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산속 요양원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자신도 자살을 한다. 와타나베가 ‘죽음은 삶의 반대편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고 느낀 약 3년간의 기억.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요쓰야에서부터 이어진 제방이 끝나는 지점인 이다바시에서 오른쪽으로 꺾는데, 이다바시는 우리가 숙박한 호텔이 위치한 곳. 전철을 타고 요쓰야까지 가서 다시 호텔로 걸어 돌아온 것이 우스웠지만, 멈추지 않고 나오코와 와타나베를 따라 걷는다. 그리고 진보초 교차로에 미치기 전에 한 재즈 카페(밤에는 재즈바가 되는 곳)에 들어가 맥주를 마셨다. 우린 19살이 아니라서 10킬로 가까이 되는 둘의 여정을 쉼 없이 걸을 순 없었다. 무엇보다 여름에 성큼 다가선 날씨였고, 목이 무척이나 말랐다.


 

《노르웨이의 숲》배경여행  ©moonee



재즈 몇 곡을 들으며(하루키도 전업작가가 되기 전까지 이런 재즈 카페를 운영했다) 목을 축인 후 다시 시작하는 산책. 책방이 줄지어 있는 진보초에서 허리를 굽히고 서 있는 사람들을 지나 오차노미즈 언덕을 올랐다. 왼쪽엔 세련되고 커다란 메이지 대학이 있다. 오차노미즈역 주변에는 학기 중이라 그런지 일요일임에도 젊은 사람들도 북적였다. 아까 전부터 길은 더 이상 산책로가 아닌 일반 보행로가 되어 있다. 오차노미즈역에서부터 약 20분 정도를 더 걸어서 도착한 곳은 도쿄대 아카몬(붉은 문). 정문보다 유명한 이 문을 지나... 가려했으나 맥주를 두 잔이나 마신 남편이 화장실을 들러야 했으므로 도쿄대학교에 잠시 들어간다.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화장실 한 번을 안 가고 내리 걸었단 말이야?’란 생각을 하며 교정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이곳 역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공놀이를 하는 아빠나, 유모차를 벤치 곁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부부들이 봄날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걷고 또 걸어 고마고메까지. 도쿄대학 근처부터는 커다란 나무들이 길을 촘촘하게 채우고 있어 지나온 진보초나 오차노미즈보단 걷기 좋은 길이 이어졌다. 그리고 중간쯤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무라카미 빵집과 무라카미 세탁소를 만난다. 물론 ‘무라카미’야 하나의 성이기도 하고, 지명이기도 해서 유난을 떨 일까진 아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속 배경을 걷고 있는 나에겐 두근거리는 장면. 게다가 그 근처에서 남편이 화장실을 한 번 더 가고 싶다고 해서(방금 전 카페에 들어가 맥주 한 잔을 더 마셨다!) 홀로 어슬렁대야 하는 시간이 길어 이 두 가게를 한참 구경했다. 세탁소엔 들어가 볼 일이 없지만 빵집 문이 열려 있다면 뭐라도 하나 샀을 텐데 아쉬워하며.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걸어 드디어 고마고메에 도착한다.   


  

《노르웨이의 숲》배경여행 - 고마고메  ©moonee
《노르웨이의 숲》배경여행 - 고마쓰안  ©moonee



고마고메에는 한껏 누그러진 봄 햇살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오코와 와타나베가 고마고메에 도착했을 때도 해가 저무는 따스한 봄날 저녁나절이었고, 둘은 소바집에 들어가 가벼운 저녁을 먹는다. 우리도 역 가까이에 있는 소바집 고마쓰안(小松庵 総本家 駒込本店)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1922년에 문을 열었다고 하는 이 가게는 최근에 리뉴얼을 한 듯 굉장히 세련되고 깔끔했다.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1968년에 들어갔을 가게와 모습은 다르겠지만, 맛은 비슷하리란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메밀 100%로 뽑아낸 소바는 고소하고 식감이 좋았다. 메밀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는 이왕이면 메밀 함유량이 높은 면을 주문하곤 하는데, 때때로 너무 거칠고 퍽퍽한 면을 만나 실망을 한다. 그러나 이곳의 면은 ‘정말 100%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그리고 여전히 목이 말라서 맥주를 두 병이나 더 마셨다. (대체 몇 cc나 마신건가...)



“여기가 어디지?” 나오코는 문득 정신이 든 듯 나에게 물었다.
“고마고메. 몰랐어? 우리 한 바퀴 빙 돌았어.”
“왜 이런 데로 왔어?”
“네가 온 거지. 난 그냥 뒤를 따라왔고.”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그리고 우린 너흴 따라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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