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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Jul 15. 2018

하루키, 그, 와타나베의 청춘이 담긴 공간

무라카미 하루키 <반딧불이>의 배경, 도쿄 와케이주쿠


6월에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된다는 건 뭔가 신기한 느낌이었다. 나나 그녀나 원래는 열여덟과 열아홉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게 옳을 듯했다. 열여덟 다음에 열아홉이고, 열아홉 다음이 열여덟-그건 이해된다. 그러나 그녀는 스무살이 되었다. 나도 오는 겨울에 스무 살이 된다. 죽은 자만이 언제까지나 열일곱이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반딧불이> 중에서



서른이 되어 떠올리는 스무 살, 마흔이 가까이 왔을 때 떠올리는 스무 살은 같은 시절의 나라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 마흔은 멀리 있는 듯 보여 잘 알 수 없지만. 하루키의 단편 <반딧불이>와 장편 《노르웨이의 숲》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같은 인물인데, 그 젊음은 닮은 듯 달리 보인다. <반딧불이>에서는 완전히 깜깜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희미한 빛을 닮은 청춘이라면 《노르웨이의 숲》은 어둠이 드리워 빛을 보다 선명하고 짙게 만든 것 같다. 지금 이 소설들을 읽으며 회상하는 나의 스무 살 무렵을 내가 조금 더 나이를 먹었을 때 떠올리게 되면 분명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기에. 지금 떠오르는 기억을 적어둬야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단편소설 <반딧불이>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하루키는 1983년 1월 《중앙공론》이란 잡지에 <반딧불이>를 처음 공개했다. <반딧불이>의 주인공은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남자로 십사오 년 전 도쿄의 한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는 갑자기 목숨을 끊어버린 가장 친한 친구의 여자 친구와 함께 보낸 시간을 회상하게 된다. 이 작품을 쓰던 하루키의 나이가 마침 서른둘, 셋 무렵. <반딧불이>에서 그와 그녀로 등장한 두 주인공은 와타나베와 나오코란 이름이 붙어 장편 《노르웨이의 숲》(1987년 10월 출간)에 다시 등장한다. 이곳에서도 둘은 주오선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만나고, 요쓰야 역에서 내려 반나절을 걷는다. <반딧불이> 속 두 주인공이 걸었던 그 길을 똑같이.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나의 대학시절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때 나는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고, 수업을 듣고,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와 저녁을 먹거나 그 일정마저도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저녁을 먹고 학교 과제를 하고 잠을 자는 지극히 따분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대학까지 와서 중간고사, 기말고사에서 한 문제라도 더 맞으려는 여대생들의 치밀함이 조금 지루하고 시시해 보였다.


그날은 유독 날이 좋았다. 신촌 일대를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셨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었다. 그 봄바람에 벚꽃잎도 흩날렸으니 아마도 소설 속 시간과 똑같이 5월이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청치마를 입고 학교 이름이 적힌 분홍빛 파일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다. 혼자서 날씨에 딱 어울리는 차림새란 생각을 했다. 남자 친구도, 약속도 없고, 같이 밥을 먹자고 할 친구도 결석이었다. 좋은 날씨에 영화관이나 도서관에 들어가 있는 일도 억울했다. 학교에서 뭉그적거려 보았지만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오르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너, 지금 어디야?”


메시지를 받자마자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연락을 한 동창이었다. 마침 신촌에 있는데 볼일을 마치고 혹시나 해서 연락을 해본 것이라고 했다. 몇 년 만에 만난 그 친구에게 말했다. 이렇게 좋은 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너무 억울했다고. 그래서 일단 무작정 내려보았다고. 물론 그렇다고 와타나베와 나오코처럼 그 이후에도 매주 만나며 연인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나는 그날을 평소와 같이 흘려보낼 수 없었다. 아니 날이 좋아서 무작정 버스에서 내릴 수 있는 젊음과 한가함이 내게 있었다.  

 


다시 서른을 넘긴 나로 돌아와서. 남편과 저녁 때가 다 되어 와케이주쿠를 향해 걸었다. 와케이주쿠는 작가 하루키, <반딧불이>의 주인공,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가 생활한 공간. 특정 학교의 기숙사가 아닌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소설에선 어딘가 우익의 냄새가 난다고 쓰여 있다. 꽤나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다. 이곳에 모여 살고 있는 이들의 젊음을 충분히 느끼게 하는 경사였다. 이 언덕에 관해 하루키는 재미난 기억을 떠올린다.  


술에 취해 나가떨어지면 누군가 들것을 만들어 기숙사까지 운반해주었다. 들것을 만들기에 실로 편리한 시대였다. 여기저기 아무 데고 플래카드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한번은 메지로 언덕길에서 플래카드가 찢어지는 바람에 정신이 바짝 들 정도로 돌계단에 머리를 부딪힌 적이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중에서


어디에 부딪혀도 아팠겠단 생각을 하며 도착한 와케이주쿠.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고요했다. 주변을 많은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나뭇잎끼리 사르르 사르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안에 탁 탁 탁 하는 커다란 소리가 담겨왔다. 소릴 따라가 보니 남학생 두 명이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야구 마니아 남편이 “꽤 잘하는데?”라며 뚫어지게 쳐다본다. 무척이나 하고 싶은 눈빛으로. 나와 보내는 시간은 다 좋은데 같이 캐치볼을 못 하는 게 아쉽다는 남편. 흐음.


기숙사를 한참 구경하고 있는데, 애교 많은 고양이가 다가왔다. 학생들의 손을 많이 탄 고양이인듯,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행동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어떡하지. 네가 원하는 걸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은데. 한참을 그러다 아무래도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지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 앉았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하루키의 작품 속 배경을 걸으며 만나는 고양이는 소소한 기쁨이다.  


이곳에 이렇게 앙증맞은 고양이가 살고 있음에도 <반딧불이>엔 고양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반딧불이’는 등장한다. (당연한가?) 와케이주쿠 옆에 친잔소라는 호텔이 있는데, 이 호텔에서 매년 여름 정원에 반딧불이를 풀어놓는다고 한다. 소설에서 룸메이트가 반딧불이를 인스턴트커피 병에 넣어 ‘여자애한테 주면 좋아할 것’이라며 주인공에게 선물한다. 반딧불이는 희미한 빛을 내며 날아오르고 소설은 끝이 난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반딧불이가 날아가자마자 다른 여자 주인공  ‘마치 봄을 맞이해 막 세상으로 튀어나온 작은 동물처럼 신선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미도리(초록)가 등장한다. 문득 '반딧불이의 초록빛은 미도리인가?' 란 느낌이 들었다.  아 생각해보니 《노르웨이의 숲》은 이렇게 끝났던가?


“너, 지금 어디야?”


공중전화 너머로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묻는 장면에서.


“녹색 좋아해?” “그건 또 왜?” “녹색 폴로셔츠를 입었으니까. 그래서 녹색 좋아하는지 물어본거야.” - 《노르웨이의 숲》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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