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하나레이 베이> 속 그곳
사치의 아들은 열아홉 살 때 하나레이 해변에서 커다란 상어의 습격을 받고 죽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소설 <하나레이 해변>의 시작
우두두 쏟아지던 빗길을 통과하여 하나레이 해변에 도착했다. 하와이 카우아이 섬 북쪽에 위치한 하나레이 만. 그곳 안에 있는 해변에 도착하니 갑자기 비가 그치고 바다 위로 파란 하늘이 슬쩍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사실 우린 하와이 같은 휴양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편을 졸라 하와이까지 온 이유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몇 차례나 불만을 표하던 남편과 투쟁을 벌이고, 태풍 솔릭, 허리케인 레인을 뚫고 도착한 것 치고는 매우 평범한 해변이다. 조금 기운이 빠졌다. 차에서 쉬겠다고 하는 남편을 뒤로하고 나는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이곳까지 오는 일에 왜 그리도 집착을 했을까. 하나레이는 내가 가장 최근에 만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 속에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 올해 여름에 발행된 일본 남성 패션지 뽀빠이에 실린 티셔츠에 관한 기고문. 그 글에는 하와이 카우아이 섬에 관한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는데, 하루키는 카우아이에서 한 달 남짓 체류한 적이 있다. 매일 아침 바다로 나가 서핑을 하고, 점심때는 차가운 소바를 만들어먹으며 휴식을 취한 시간. 특히 하나레이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옛날의 하나레이는 꽤나 여유롭고 여하튼 멋진 동네였답니다. 하루 종일 해변에서 뒹굴며 파도와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어도 전혀 질리지 않았어요. 석양도 늘 눈부시게 아름다웠죠. 사람들이 우쿨렐레를 들고 비치에 모여, 노래를 부르며 석양을 보고 있었죠. 지금은 많이 변했으려나 궁금합니다.
- 잡지 뽀빠이 8월호 중에서
그리고 아마 이때의 시간을 바탕으로 탄생한 소설이 《도쿄 기담집》에 엮여 있는 단편소설 <하나레이 해변>이다. 주인공 사치가 자신의 아들을 하나레이 만에서 잃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치는 도쿄에서 피아노 바를 운영하며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는 중년 여성. 자신이 피아노에 빠져 지냈듯 아들은 서핑에 빠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데카시는 하나레이에 가서 파도를 타고 싶다며 떠나버린다. 얼마 뒤 사치는 데카시가 상어에게 한쪽 다리를 물린 후 죽었단 전화를 받게 된다. 이 이야기는 최근에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고 나는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며 하나레이 해변에 서 있다. 한참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는 하루키의 표현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가 이곳에 앉아, 그리고 소설 속 사치가 이곳에 앉아 보낸 시간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하와이에 있는 다른 해변들과 비교해서 사람이 많지 않아 굉장히 여유로운 분위기.
양산을 쓰고 벤치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양산을 들어 올리고 뒤를 돌아보니 한 할머니가 피고 있던 담배를 급히 테이블 밑으로 숨겼다. 귀여운 몸짓. 괜찮답니다. 다시 바다를 바라보며 모른 체 하고 있자 다시 한동안 담배냄새가 났다. 그러다 할머니가 해변에 가있는 딸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물 온도 좀 봐줘. 들어갈 수 있겠어?”
카우아이 섬은 하와이 제도에선 드물게도 비가 많은 지역. 일 년 내내 비가 내린다고 해도 무방하단다. 이렇게 잠시 해가 날 때 바다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언제 폭우가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차로 돌아가며 ‘오늘 저녁은 돌핀 레스토랑에서 먹어야지’ 생각했다. 사치는 아들이 죽은 해변을 해마다 찾아간다. 같은 코티지에 머물며 같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해변에 앉아 서퍼들을 바라보며 보내는 시간. 그리고 하나레이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도 종종 피아노를 치곤하는데, 물론 소설에는 레스토랑 이름이 구체적으로 등장하진 않는다. 나는 하루키가 카우아이에 머물며 쓴 에세이집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등장한 돌핀 레스토랑이 어쩐지 소설 속 분위기가 매우 닮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돌핀 레스토랑은 하나레이 만 지역에선 더 이상 만나볼 수 없다. 1970년대부터 스시, 해산물, 스테이크 등을 팔며 인기가 좋았던 이 레스토랑은 2012년에 카우아이 섬 남쪽에 위치한 포이푸에 두 번째 지점을 열었고, 현재는 포이푸에서만 영업을 하고 있다. 아쉽지만 포이푸에 가서 소설 속 분위기를 느껴보기로 했다.
포이푸의 돌핀 레스토랑은 소설 속 묘사와 분위기는 조금 달라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식당이었다. 캘리포니아롤과, 스파이시 쉬림프 롤, 그리고 맥주를 주문했다. 물놀이로 지친 탓인지 커다랗고 시원한 병에 나온 아사히맥주에서 정말 꿀맛이 났다. 게다가 식사도 간이 딱 맞고. 미국에서 하는 식사 치고는 충분히 매콤한 점도 만족스러웠다. 하루키 역시 오전에는 달리기를 하고, 오후엔 수영을 한 뒤 돌핀 레스토랑에 가서 맥주와 ‘왈루’라고 하는 생선 요리를 먹는다.
이렇게 하나레이 해변에 앉아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밥을 먹고. <하나레이 해변> 배경여행은 끝이 난다. 사실 이곳까지 온 여정을 떠올리면 이런 결말은 허망하다. 이곳에 오기 전 나는 일주일 내내 태풍의 이동경로 지도만 수백 번은 족히 보았다. 그것도 일본 기상청, 미국 기상청, 당연 한국 기상청에서 나오는 모든 지도들을 비교해가면서....... 가기 싫다던 남편을 졸라 겨우 가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비행기를 타는 날 6년 만에 한반도를 관통하는 태풍이 온다니. 게다가 하와이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은 이사를 하기로 되어 있어 일정은 앞으로도 뒤로도 변경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회사는 재택근무를 한다는 공지가 내려왔고, 전국은 태풍 대비로 부산했다. 그러나 솔릭이 우려만큼의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나가 인천에서 떠오를 비행기는 변경 없이 뜰 예정이었다.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이번엔 하와이에 26년 만에 대형 허리케인이 온단다. 하와이 주민들이 가솔린과 물을 사재기하고 있으며, 관공서는 휴무, 학교는 휴교 결정.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이 하와이를 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식당과 마트도 모두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듣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 불안한 상황을 이래저래 통과하여 겨우 도착한 하나레이 해변이었다. 그리 온 것치고 이곳은 너무나도 소박했다. 물론 이 소박한 풍경을 만나러 사치는 매년 가을의 끝 무렵 하나레이에 가서 삼 주를 머문다. 지금쯤 하나레이에 가신다면 해변에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한 여자를 찾아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