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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Dec 23. 2018

모든 것이 투명하게
비쳐 보일 것 같은

무라카미 하루키 <1973년의 핀볼> 배경여행

버스 문이 쾅하고 닫히고 쌍둥이가 차창에서 손을 흔들었다.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나는 같은 길을 혼자 되돌아와 가을 햇살이 넘치는 방 안에서 쌍둥이가 남기고 간 <러버 솔>을 들으며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11월의 일요일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비쳐 보일 것 같은 한 11월의 조용한 일요일이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1973년의 핀볼> 중에서



쌍둥이가 떠나간 11월. 나도 이곳의 투명한 가을을 걸었다.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었을 때만 해도 굉장히 엉성하단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들고 나온 두 번째 작품 <1973년의 핀볼>을 읽고 흠칫 놀란 기억이 있다. 두 번째 작품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데다 이 작품을 쓸 때까지 하루키는 여전히 재즈바를 운영하고 있었다.



하루키 초기 3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의 주인공은 모두 ‘나’와 ‘쥐’. 그리고 제이스 바를 운영하는 중국인 J도 등장한다. <1973년의 핀볼>에서 주인공 ‘나’는 한때 즐겨했지만,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추억의 핀볼 기계 스페이스십을 찾고 있다. 소설은 도쿄 외곽에서 쌍둥이 여자(이름은 모르고 208번, 209번으로 구별한다)와 생활하고 있는 ‘나’의 이야기와 고향인 고베에 있는 ‘쥐’의 일상이 병렬로 진행된다. 물론 시간은 1973년. 주제는 하루키 소설의 단골 주제인 상실감. <1973년의 핀볼>이 <미국의 송어낚시>를 쓴 미국 작가 리처드 브라우디티건의 오마주 작품이란 이야기를 듣고 <미국의 송어낚시>에 수록되어 있는 <호텔 ‘미국의 송어낚시’ 208호>를 읽어보았다. 208란 이름을 가진 고양이(!)가 등장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다른 고양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지구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양이’라 믿고 있는 빨간색 고양이. 작품 속 주인공은 고양이의 이름이 ‘미국의 송어낚시’란 호텔방의 번호에서 유래했다 생각한다. (물론 이대로 소설이 끝나버리진 않는다.) 편 <1973년의 핀볼>에 등장하는 두 쌍둥이가 208번, 209번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그들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 208, 209란 숫자가 박혀있기 때문. 둘은 슈퍼마켓 개업 기념으로 티셔츠를 받았는데, “내가 209번째 손님이었어.” 209가 말했다. “내가 208번째 손님이었구.” 아쉽게도 <호텔 ‘미국의 송어낚시’ 208호>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한 마리뿐. 209번 고양이는 없었다. 아쉬운 일까진 아니지만.



<1973년의 핀볼>의 배경여행을 하기 위해선 <양을 쫓는 모험>을 다시 들춰봐야 했다. 구체적인 지명이 등장하지 않는 <1973년의 핀볼>에서 이야기가 이어지는 다음 작품 <양을 쫓는 모험>에 힌트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같은 주인공 ‘나’에게 대학시절(미타카 변두리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던 당시) ‘누구 하고도 자는’ 여자가 매주 화요일 저녁에 찾아온다. 둘은 저녁을 먹고 록 음악을 들으며 밤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에 잡목림을 걸어 국제 기독교대학(ICU) 캠퍼스까지 산책한다. 그러고 나서 2년 뒤, 1973년 쌍둥이가 미타카에 있는 주인공의 집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녀들이 왜 내 집에서 지내게 되었는지, 언제까지 있을 작정인지, 아니 도대체 누구인지, 나이는? 태어난 곳은? 나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들도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우리는 셋이서 커피를 마시거나, 저녁때 떨어져 있는 공을 찾으면서 골프 코스를 산책하거나, 침대에서 노닥거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 무라카미 하루키 <1973년의 핀볼> 중에서



내가 ICU에 도착했을 땐 마침 쌍둥이가 주인공을 떠난 계절이었다. ICU는 주말이라 학생들보단 가족단위로, 친구들과 피크닉을 보내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소설의 마지막처럼 가을 햇살이 캠퍼스 전체에 듬뿍 떨어지고 있어서 굉장히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느릿느릿해 보였고, 말씨는 부드럽게 들려왔다. 아무리 소설 주인공이라도 사는 곳 곁에 이렇게 근사한 공간이 있는 것은 정말 축복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이곳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실제로 20대 초반을 보낸 장소다. 하루키는 이곳을 ‘공기가 깨끗하고 조금만 걸으면 아직 자연 그대로 남아있는 무사시노의 잡목림이 있어 굉장히 행복했다’는 문장으로 회고한다. 


국제 기독교대학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그 안을 산책하는 일만으로도 체력이 꽤나 소진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플랫슈즈를 신고 있던 나는 미타카 역에 있는 무인양품에서 스니커즈를 하나 샀는데, 사지 않았다면 크게 후회했을 정도로 긴 시간을 걸어야 했다. 게다가 ‘나’와 쌍둥이가 산책을 즐기는 골프장은 현재 노가와 공원이 되어 있었는데, 소설에선 분명 ‘바로 곁에 있다’고 되어 있고, 지도상으로도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참을 돌아가야 다다를 수 있는 장소였다. 주인공이 왜 철조망을 넘어 쌍둥이들을 찾으러 갔는지 알만 했다. 이렇게 여행이 소설의 한 구석이 이해하게 해준다. 여러 차례 철조망을 뛰어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1973년의 핀볼>의 주요 무대 중 하나인 노가와 공원은 그 역사가 꽤 길다. 원래 비행기를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가, 우유를 만드는 목장으로 쓰였다가, 기독교대학(ICU)의 골프장이었다가 지금은 공원이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근처에 살았을 때, 그리고 <1973년의 핀볼> 속 주인공들을 둘러싼 배경은 이곳이 ‘골프장’이었을 때다. 공원이라 하지만 어딘가 골프장 같은 이곳에서 나는 가을 벚꽃을 만났다. 조가쓰자쿠라(ジュウガツザクラ)라는 종으로 봄에도 꽃을 피우고, 가을에도 꽃을 피운다고 한다. 가을에 만나는 벚꽃은 반갑기도 하면서도 어딘가 초조한 느낌을 준다. 이미 방학숙제를 다 끝냈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은 그날의 마음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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