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 배경여행, 도쿄 이노카시라 공원
도쿄의 중앙선을 타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속 배경여행의 7할? 8할? 은 완성할 수 있다.
이번에도 나는 어느 맑은 토요일 아침 신주쿠의 호텔에서 나와 중앙선에 올랐다. 하루키 소설의 배경이 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는 중앙선을 따라 곳곳에 숨어 있다. 이번엔 기치조지역까지 가서 내린다. 사실 기치조지는 몇 번인가 가보았는데 주로 상점가 구경을 했기 때문에 가까이에 있는 이노카시라 공원까지 가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노카시라 공원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에 등장한다.
그녀는 기치조지에 방 한 칸짜리 아파트를 빌려 최소한의 가구와 최대한의 책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오전에 일어나서 오후에는 산속을 헤매는 행자마냥 이노카시라 공원을 산책했다. 날씨가 좋으면 공원 벤치에 앉아 빵을 먹고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중에서
<스푸트니크의 연인> 속 주인공은 총 세 명. 주인공 ‘나’와 ‘스미레’, 그리고 ‘뮤’가 등장한다. 나는 스미레를 좋아하고 스미레는 뮤를 사랑한다. 뮤는 하루키 소설에서 아마도 유일한 한국 국적의 여성. 다른 이야기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국에 이렇게나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음에도(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한국 땅을 밟아 본 적이 없다. (비밀리에 왔다 갔다면 미안합니다.) 어쨌든 ‘뮤’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한국 북부에 있는 자신의 고향에 기부를 많이 한 덕에 동상까지 세워진 인물이다. (음. 한국 사람들은 어지간한 인물이 아니면 동상을 세워주지 않는데 말이지.) 한편 ‘뮤’를 사랑하게 된 ‘스미레’는 기치조지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살며 소설가를 꿈꾸는 아가씨. 종종 자신이 쓴 글을 한 아름 안고 주인공 ‘나’를 찾아가는데, ‘나’는 기치조지에서 중앙선을 타고 5개 역을 더 가면 있는 구니타치에 살고 있다. 스미레는 뮤의 비서로 일하며 유럽 출장까지 동행하게 되고, 그리스의 한 섬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만다.
내가 도착한 배경은 스미레가 뮤에게 흠뻑 빠져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버리기 전, 다소 와일드한 모습으로 걸어 다닌 이노카시라 공원이다. ‘집 곁에 이런 공원이 있다면 집이 조금 좁은 들 무엇이 문제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노카시라 공원은 좋은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가운데 있는 연못물은 그리 맑지 않고 공원 전체 크기도 아담한 편이었지만,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편안한 분위기로 충만했다.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공원은 인위적으로 조성해내기란 어렵다. 아마 오랜 시간을 거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리라. 조깅을 하거나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많았다. 종종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고 벤치에 앉아 전화통화를 하거나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 남자도 있었다. 그가 여자이기만 했다면 나는 “이노카시라 공원에서 스미레를 만났어”라고 했을 것이다. 공원에 붙어 있는 맨션의 정문(인지 후문인지)은 공원으로 바로 이어져있었는데, ‘이렇게 큰 수혜가 있을 수 있을까’ 싶다. 물론 스미레가 이런 맨션에 살았을 리 없다. 그녀는 한 칸짜리 방에서 최소한의 가구와 최대한의 책과 함께 살았으니까. 조금 더 걷다 보니 작은 절, 벤자이덴에 도착했다. 그리고 벤자이덴 바로 앞에 공중전화가 진짜로 있었다.
그녀의 아파트에서 이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전화박스가 있다. 스미레는 전화가 없기 때문에 늘 그곳까지 걸어가서 전화를 건다. 지극히 평범한 전화박스다.
-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중에서
물론 하루키가 이 소설을 쓴 해(1999년)에는 전화박스가 흔했겠지만, 요즘같이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세상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전화박스다. 이 전화박스에서 스미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나, 사랑에 빠졌어”라고 말한다. 날도 밝지 않은 새벽 네 시 십오 분에.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스미레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영화로 치면 ‘역사에 남을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힐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의견) 그리고 다시 ‘교환 가능하고 어디까지나 기호적인 전화박스’에서 스미레가 '나'에게 전화를 걸며 소설은 끝난다. 나는 전화박스를 눈앞에 두고 서서 소설의 여러 장면들을 떠올리며 전화박스 안에 스미레를 슬쩍 넣어 보았다.
그러고 나서 구니타치에 가서 몽블랑을 먹었다. 스미레는 새벽의 전화를 끊은 뒤 그날 저녁에 주인공 ‘나’의 동네로 찾아가, 둘이 자주 들르는 커피숍에 앉아 자신이 사랑에 빠진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구니타치 역 가까이에 있는 하쿠주지에서 몽블랑 케이크를 팔고 있다. 하쿠주지는 확실히 ‘카페’라기보단 ‘커피숍’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곳으로, 1955년부터 있었으니까 스미레와 주인공이 이곳을 종종 들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는 몽블랑 케이크가 너무 달아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작품 속 주인공들이 몽블랑을 즐겨 먹곤해서 어쩔 수 없이 먹을 때가 생긴다. 운이 좋게도 이곳의 몽블랑은 적당히 달아서 먹기 좋았다. 스펀지 케이크 위에 밤이 들어간 크림을 몽블랑산 처럼 쌓아 올린 전형적인 몽블랑. 커피도 전형적인 일본 커피맛이다. 호텔 조식에서 나오는 커피에서도, 이런 오래된 커피집에서 마시는 커피에서도 일본 특유의 맛과 향이 나곤 한다. 아마도 물과 흔히 쓰이는 기계의 영향이겠지. 비록 내 앞엔 사랑에 빠져 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초봄의 몰다우 강처럼”
*) 물론 해당 정보는 <산책으로 즐기는 무라카미 하루키 さんぽで感じる村上春樹> (나카무라 구니오, 미치마에 히로코 저)를 통해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