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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Jan 13. 2019

하루키를 따라 도쿄를 걷는 일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배경여행

그 여자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내 주위에 있는 모든 풍경이 한순간에 얼어붙어 버린 듯이 느껴졌다. 내 가슴속에서 공기 덩어리 같은 것이 목 언저리까지 솟아 올라왔다. 시마모토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ciS5GikZ5Jo&list=PLqiKuvvuwk7wN8vJtmQ4sf3sYPsMCKuU5


하루키 작품 중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좋아하는 작품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음악과 함께 읽는 것이 좋다. 외동아들인 주인공은 어린 시절 자신과 똑 닮았으면서도 매우 다른 외동딸 시마무라를 만난다. 둘은 함께 하교하고, 시마무라의 집에서 시마무라 아버지의 오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낸다. 시마무라 아버지의 오디오는 근사한 신형이었지만 레코드는 열다섯 장 정도밖에 없다. 둘은 같은 레코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대부분이 초보자용 클래식이었지만, 냇 킹 콜과 빙 크로스비의 레코드도 섞인.


Pretend you’re happy when you’re blue,
It isn’t very hard to do.


‘고통스러울 때는 행복한 척해요.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란 가사는 시마무라의 표정과 매우 닮았음을, 또 그 음악이 흐르던 시간을 주인공은 매우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마무라는 태어나자마자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조금 절었으며, 성적도 좋고 성격도 좋았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 주위에 방어벽을 높이 세우고 스스로를 강하게 지키는 인물이다. 둘은 매우 가까이 지내다 주인공의 가족이 이사를 하고, 서로 다른 학교에 진학하며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그 이후부터 주인공의 삶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자신과 매우 닮아 있다. 시내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등학교(하루키가 나온 고등학교 옥상에서도 고베 시내와 바다가 내려다보인다고 한다)에서 이즈미라는 이름의 여자 친구를 사귀고, 도쿄의 대학에 진학한다. 졸업을 하고 나서는 회사에 다니다 재즈바를 운영한다. 작가와 닮은 면이 많은 주인공이기 때문인지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주인공이 가장 멋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인공이 운영하는 바는 예상보다 굉장히 번창해서 2년 후에 아오야마에 가게를 하나 더 내게 된다. 아오야마는 하루키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장소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주인공 ‘나’와 뚱뚱한 손녀딸이 지하세계에서 도망쳐 나오는 곳도 아오야마 잇초메 역이고, 하루키가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진구구장도 곁에 있다. 진구구장에 들렀다 아오야마를 걸었다. 아오야마에 있는 가게들은 쉽사리 들어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왠지 여행객 차림으로 들어가기엔 민망하다. 위화감이 없는 쉐이크쉑에 들어가 햄버거를 하나 먹고 나왔다. 그리곤 줄곧 걷다 보니 육교를 하나 만났다. 가이엔 동쪽 길을 운전하던 주인공이 시마무라를 닮은 여자를 보고는 차를 세우고 무작정 뛰어 올라간 육교!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본 여자가 시마무라 일리 없단 사실을 깨닫고, 고등학생 때 사귄 이즈미를 보게 된다. 택시 안에 앉아 있는 그녀의 표정이 없는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서는 표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박탈되어 있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중에서



이즈미에게는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빠져있다고 느낀 주인공은 아오야마 뿐만아니라 도쿄 곳곳에서 시마무라의 흔적을 좇는다. 시부야에서도 시마무라를 따라가다 누군가에게 잡혀 10만 엔이 든 하얀 봉투와 ‘그녀를 미행하는 건 이걸로 끝내라’는 말을 걷네 받는다. 시부야. 이토록 혼잡한 곳에서 시마무라를 미행하고 있는 주인공을 따라가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란 생각을 할 때엔 이미 도쿄의 밤이 깊어 있었다.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란 책을 보다가 하루키의 단골 술집 ‘바 라디오(bar radio)’가 아오야마에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 그래도 하루키가 ‘바 라디오의 블러디 메리는 마셔볼 가치가 있다’고 한 문장이 기억에 남아 있다.(정작 아오야마를 걸을 땐 깨끗이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마침 바 라디오는 나의 친구 집에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렇게 나는 바 라디오로 향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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