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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Nov 02. 2019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골목을 찾아

《태엽 감는 새》배경여행,  도쿄 교도역, 기요마사 우물


그날은 일부러 자전거를 타고 역 앞까지 나가기로 했다. 그녀가 자신의 옷을 그 가게에 맡긴 것을 알면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중에서


오랜만에 생긴 도쿄에서의 나 홀로 저녁시간이었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을 싫어하진 않지만, 아니 오히려 매우 좋아하는 편이지만 정작 퇴근 시간이 다가오니 무얼 해야 할지 막막했다. 도쿄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렇담 어딜 가서 저녁을 먹지. 이왕이면 회사가 있는 신주쿠를 벗어나 보자고 생각했다. 매번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신주쿠역 주변에서 인파에 치이며 밥을 먹는 일이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한 골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골목.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이 자주 오가는 골목을 찾아보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태엽 감는 새》에는 법률사무소를 다니다 그만두고 주부로 살고 있는 서른 살의 오카다 도오루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아내 구미코와 고양이와 함께 도쿄 세타가야의 한 주택을 외삼촌으로부터 싸게 빌려 산다. 그러던 어느날 고양이가 집을 나가고, 아내도 함께 집을 나간다. 집으론 기묘한 전화가 걸려오고, 점술가 가노 마루타, 그의 동생 구레타, 그리고 이웃에 사는 가시하라 메이와 엮이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대개 그렇듯 줄거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기가 어려운데, 오랜만에 《태엽 감는 새》를 다시 읽어보니 하루키의 가장 최신작인 《기사단장 죽이기》와 매우 흡사한 점이 많음을 발견했다. 두 소설 모두 세계 제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과 과오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태엽 감는 새》에서는 집 근처에 마른 우물 이 있고, 《기사단장 죽이기》에선 새벽마다 방울소리가 들리는 구덩이를 파헤친다. 그리고 두 주인공은 우물과 구덩이에 들어간다.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이 사는 마을에 가면 이런 우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그 비슷한 것이라도. 아니면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골목에 관한 힌트라도 말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묘사하는 마을엔 오다큐선이 지나며 구립 수영장이 있고 역 근처에 도서관, 세탁소가 있다. 《산책으로 즐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자 나카무라 구니오는 아마 ‘교도 역(経堂駅)’이 아닐까 추측했다. 고로 내가 저녁을 먹게 될 역은 바로 교도 역이다. 오타큐선에 오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교도 역에 내렸다. 분주히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인 듯 남편을 만나 함께 돌아가는 젊은 아내의 모습도 보이고 무척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오카다 도오루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집과 슈퍼마켓, 도서관, 집 근처 구립 수영장만을 오가며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역 계단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는 샐러리맨들을 보고는 멍해진다. 나도 오카다가 (아마도) 서 있었을 길 위에서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역 앞에는 오카다 도오루의 아내가 좋아할 만한 세탁소가 있었다. 심지어 세탁소 이름은 무라카미 클리닝! 우연인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절묘하다. 일단 배가 고파 중국집에 들어가서 탄탄면과 맥주 한 잔을 마시고 골목이든 우물이든 찾으러 나서기로 한다. 탄탄면은 예상했던 것보다 매워서 입맛에 딱 맞았다. 곁들인 맥주 맛이야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고. 역 앞 상점가를 벗어나 주택들이 모여 있는 마을 깊숙이 들어간다. 걸으면 걸을수록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이었다. 산책로가 잘 꾸려 있고, 작지만 따뜻한 느낌을 주는 놀이터도 있고. 그리고 재밌게도 무라카미라는 글자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무라카미 부동산, 무라카미 빌딩, 무라카미 총업 …



《태엽 감는 새》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꼭 한번 배경여행을 해봐야겠다 생각한 이유는 소설에 등장하는 골목 때문이었다. 여러 집의 뒷마당을 잇는,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골목. 잘 상상되지 않았다. 이 골목이 머릿속에 잘 안 그려지다 보니 계속 신경이 쓰여서 소설 전체 이야기에 빠져들지 못했다.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이런 묘사에 딱 맞는 골목이 없을까. 그 골목으로 이어지는 집 중 하나에 우물이 있을까. 마을을 한참 헤맸다. 해는 저물어갔지만 나는 골목도 우물도, 조금 닮은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등에 주름이 간 양복차림으로 서둘러 집으로 향하고 있는 남자, 강아지를 끌고 산책을 하는 외국인, 저녁 반찬거리를 자전거 바구니에 싣고 페달을 힘차게 밟는 아주머니. 모두가 나를 살짝 곁눈질하며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초조한 마음이 들며 헛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무얼 찾고 있는 거지. 소설 속에 그려진 가상의 공간이 실제로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에 함몰되어 급히 출발해버리고 종잡을 수 없이 직진하고 마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며 다시 역으로 돌아갔다. 익숙하지 않은 마을을 어두워진 뒤에 계속 걷는 일은 좋지 않다. 역으로 돌아가니 교도 도서관이 보여 들어가 보았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공간인 듯 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하루키의 책이 있을까 싶어 ‘무’로 시작하는 작가들의 소설이 꽂힌 책장에 가보았지만 모두 대여중인지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곳에서 책을 빌려도(빌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때 반납할 수 없기에 서둘러 나와 역 바로 앞에 있는 산세이도 서점에 들어갔다. 마침 《기사단장 죽이기》의 문고본이 나왔단 소식이 책장에 크게 걸려 있었다. 이 정도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이쯤에서 만족하자. 하루키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 한 권을 사서 호텔로 돌아갔다.    


그래도 좀 아쉽다. 어딘가 부족하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왠지 글을 쓸 기분이 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교도 역에 가서 다시 골목을 찾아보는 일은 더 우습다. 게다가 요즘 세상에 우물이 있을 리 없고.



두어 달이 지나고 다시 간 도쿄 출장에서 나는 어디에서 점심을 먹을까 찾으려 구글맵을 켰다. 그리곤 지도 안에서 ‘우물’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떠올라 그곳으로 바로 튀어나갔다. 기요마사 우물. 진짜 우물이 있구나. 사실 우물이란 건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긴 하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구글맵에서 우연히 마주한 우물이란 글자는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찾아가 보니 도쿄를 처음 찾는 여행객이라면 한 번쯤은 가보게 되는 하라주쿠, 메이지진구 안에 있다. 메이지진구를 몇 년 만에 오는 거지. 메이지진구는 고등학생 때 처음 방문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도리이 아래서 사진을 찍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모습이나, 입구에서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일본인들의 모습이나. 그러나 나는 그 옛날엔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우물을 이곳에서 찾고 있다. 우물은 500엔을 내야 들어가 볼 수 있는 어원 안에 있었다. 어원 입구에 들어서서 화살표를 따라 우물을 찾아간다. 계속해서 보이는 표지판 화살표 끝엔 우물이 있다고 하는데 걸어도 걸어도 우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건 완전 구미코를 찾아 헤매는 오카다 도오루 같잖아. 겨우 도착한 우물엔 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태엽 감는 새》 속 우물은 말라 있어서 도오루가 사다리를 내려 내려갈 수 있는데 이 우물은 들어갈 수 없다. 또 깊지 않아서 바닥이 시원하게 보인다. 나무를 옮겨 심었다가, 대가뭄 때문에 마른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맑고 투명한 물이 샘솟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더 이상의 집착은 그만두자. 집착 때문에 점심도 굶어 버렸잖아.


좀처럼 찾기 어려워 처음엔 이게 기요마사우물인줄 알았다. 소설 속 우물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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