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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Jan 13. 2019

그들이 삿포로까지 가야 했던 이유

《양을 쫓는 모험》, 《댄스 댄스 댄스》 배경여행


‘쥐’가 먼저 홋카이도로 떠난다.

‘나’는 ‘키키’와 함께 홋카이도로 향한다.

다시 나는 ‘키키’를 만나러 홋카이도에 간다.  

그들은 홋카이도까지 가서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홋카이도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


서른넷이 되어 나는 다시금 출발점에 되돌아온 셈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먼저 무엇을 하면 좋은가? 생각할 것까지도 없었다. 무엇을 하면 좋은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결론은 훨씬 전부터 짙은 구름처럼 내 머리 위에 빠끔하게 떠 있었다. 나는 다만 그것을 실행에 옮길 결심을 할 수 없어서, 하루 또 하루 미루고 있었을 뿐이다. 이루카 호텔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출발점인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댄스 댄스 댄스》 중에서


매년 겨울 홋카이도를 찾는다. 벌써 다섯 번째 해를 맞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삿포로 구석구석을 두 발로 걸으며 돌아다닌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홋카이도청 구본청사를 가본일도. 삿포로 TV탑에 올라 오도리 공원을 내려다본 일도. 우선 삿포로는 도시 여행을 별로 즐기지 않는 남편과 나에게 너무나도 큰 도시였다. 인구로 따지면 일본에서 5위고, 홋카이도 대부분의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니까. 그리고 그간 걸을 일이 없었던 이유는 늘 렌터카를 빌려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홋카이도는 전체 면적이 남한에 4/5 정도 되기 때문에 도시 간 이동에는 자동차가 필수다. 물론 기차나 버스란 선택지가 있지만 배차간격이 길어 일정에 제한이 생긴다. 


치토세행 비행기를 타기로 한 날 새벽 네 시였다. 남편이 화들짝 놀라며 깨더니 “국제 면허증 만료된 것 같아”란다. 오늘은 토요일. 재발급받을 방법은 없다. 그렇게 대부분의 코스를 렌터카 일정으로 짜둔 상태에서 뚜벅이 여행이 시작되었다. 하필이면 이 한겨울에! (《양을 쫓는 모험》 속 두 주인공은 아마도 가을에 갔다지. 그래도 춥다며 “우리는 빙하시대에 만나야 했던 게 아닐까요?”, “당신은 매머드를 잡고 나는 아이를 기르고.” 따위의 농담이나 던지고 있다니.) 

삿포로의 거리는 넓고 지겨울 정도로 직선적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직선으로만 구성된 거리를 걸어 다니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마모시키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나는 확실히 마모되어 갔다. 나흘째에는 동서남북의 방향감각이 소멸했다.
- 《양을 쫓는 모험》 중에서


두 발로 걸어본 삿포로 시내는 차로 스쳐 지나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삿포로역 주변을 제외하곤 생각했던 것보다 황량하고 쓸쓸한 느낌이었고, 자로 잰 듯 지나치게 정확히 구획되어 있어 더욱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며칠 전까지 머문 후라노, 비에이, 아사히카와(삿포로보다 북쪽에 있는) 보다는 기온이 높았지만 더 추운 느낌이 들었다. 빌딩 숲이 불러오는 바람의 감촉이 숲(후라노, 비에이에 있을 땐 산에 둘러싸여 있었다)에서 부는 것보다 사늘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기 3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에서 같은 주인공을 세워 이야기를 이어간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주인공 ‘나’와 ‘쥐’를 소개한다. 그다음 《1973년의 핀볼》에서 ‘나’는 ‘쥐’와 함께 즐겼던 핀볼 기계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나이를 조금 더 먹은 주인공은 ‘쥐’로부터 양 허리춤에 커다란 별이 그려있는 엽서를 한 장 받게 되고, 이 양을 찾으러 홋카이도로 떠난다. 《양을 쫓는 모험》의 다음 작품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노르웨이의 숲》-을 보면 《양을 쫓는 모험》으로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일이 끝난 듯싶지만, 하루키는 《댄스 댄스 댄스》란 작품에 다시 초기 3부작의 주인공들을 등장시켰다. ‘나’는 다시 양을 쫓는 모험을 함께 했던 여자 친구 ‘키키’를 찾아 떠난다. 그녀와 함께 머문 삿포로에 있는 이루카 호텔로.


이루카 호텔은 《양을 쫓는 모험》에서 두 개 손가락이 두 번째 마디부터 없는 남자가 손님을 받고 있는 낡고 볼품없는 호텔이었지만, 《댄스 댄스 댄스》에서는 새단장을 해 등장한다. 단정한 제복을 입은 직원들, 휘황찬란한 대형 유리와 스테인리스 기둥이 올라간 로비가 있는, 삿포로 시내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호텔이 되어 있다. 소설을 통해 이루카 호텔이 어디인지 유추해내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미 어느 도시에서나 만날 수 있는 호텔이 되어버렸기에 어느 호텔에서건 《댄스 댄스 댄스》를 느낄 수 있으리라. 우리가 머문 호텔 역시 주인공이 묘사한 것처럼 거대한 쇼핑센터가 있고, 사우나도 있고, 레스토랑과 바가 있고, 리무진 서비스가 있었다. 아! 그리고 주인공이 만난 호텔 직원 유미요시처럼 아름다운 직원이 방까지 안내를 해주었다. 주인공은 이런 고급 도시 호텔에서 예전의 이루카 호텔을 그리워한다. 과연 《양을 쫓는 모험》 속 이루카 호텔 같은 곳이 어딘가에는 남아 있긴 한 걸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반에 작품을 쓸 때만 해도 현지 취재를 한 후 썼다. 이후부터는 먼저 배경을 상상하여 쓴 후 출간 직전에 돌아보며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을 수정하는 스킬을 득한 듯하다. (나는 실제로 취재에 관한 내용을 하루키에게 직접 물어본 후, 답변을 받아본 적이 있다. LINK) 따라서 초기 작품들은 배경과 상당히 밀접해 있다. 내가 이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경여행을 할 맛이 나니까! 하루키가 재즈바 운영을 접고 전업 소설가가 되어 쓴 《양을 쫓는 모험》. 이 작품을 쓸 때(198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에서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장소라 하면 역시 홋카이도였다. (물론 오키나와도 있지만.) 그땐 드라마를 찍을 때도 비용이 많이 드는 해외 로케이션 대신 홋카이도에 가서 촬영을 하곤 했다고 한다. 《양을 쫓는 모험》은 하나의 홋카이도 가이드북으로 삼아도 좋을 정도로, 홋카이도와 상당히 가깝게 맞닿아 있다. 우선 주인공들이 찾고 있는 양의 몸에는 홋카이도 개척의 상징인 북극성이 박혀 있다. 이 북극성은 1869년 홋카이도에 설치된 관청 깃발에 그려진 것인데, 삿포로시 시계탑, 도청사에도 같은 모양의 별이 들어갔다. 게다가 ‘양’이야말로 홋카이도의 명물. 홋카이도는 양고기를 구워 먹는 칭기즈칸 요리가 유명하다.


주인공들은 몸에 별이 박힌 양을 찾기 위해 홋카이도청 축산과를 찾아간다. 홋카이도청 구본청사 옆에 있는, 신도청이라 하기엔 이미 무척이나 낡은 도청 건물에 축산과는 7층에 있었다. 물론 주인공들이 이미 양을 찾아냈으니까 (아 못 찾았던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비밀로) 우린 축산과에 물어볼 것이 없다. 그리고 물어보면 쫓겨나겠지. 


걸으면 걸을수록 더 와닿는 사실이었지만 하루키의 문장대로 삿포로는 철저히 직선으로만 이뤄진 계획도시다. 삿포로 TV탑에 올라가 보아도, JR 타워에 올라가 내려다보아도 부드러운 곡선을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널찍널찍한데 사람은 극히 적다. 그나마 관광객이 있지만, 아직 눈축제가 시작되기 전이라 많지 않다. 도시 전체가 규모에 비해 텅 빈 느낌이었다. 도시의 인상은 두 작품의 분위기와 매우 닮아 있었다. 이곳 삿포로 거리에서 《댄스 댄스 댄스》의 주인공은 ‘극지의 섬에 홀로 남겨져 있는 듯한 격렬한 고독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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