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배경여행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재즈바 피터 캣을 운영하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작품이다. 하루키는 이 소설로 군조 신인상을 수상하며 1979년에 등단했다. 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처음 읽고, '군데군데 코가 빠진 목도리' 같단 느낌을 받았다. 소설을 읽었다기 보단 사진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주인공은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21살의 ‘나’이다. 시간적 배경은 1970년 8월 8일에서 8월 26일까지. ‘나’는 방학을 맞이하여 항구도시인 고향으로 돌아오고, ‘쥐’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와 매일같이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새끼손가락이 없는 여자를 조우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신칸(阪神間)’이란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베(神戸)와 오사카(大阪) 사이 지역을 한신칸이라 부른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구체적인 지명이 등장하진 않지만, 첫 작품인 만큼 하루키는 자신에게 친숙한 장소, 고베와 한신칸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 2년 뒤에 소설은 영화화되었고, 이 지역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감정도 크지만, 그보다 무척이나 부러워하는 나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가 어떤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떠난 여행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신칸 여행은 근사했다. 나는 일 년간 요코하마에서 지냈던 적이 있어서 이 일대도 비슷할 것이라 지레 짐작했다. 두 곳 모두 도쿄와 오사카, 큰 도시를 곁에 두고 있으며, 항구가 있고 차이나타운이 있으니까. 그러나 요코하마보단 차분하고 고풍스러움이 있었다.
오사카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푼 나는 라멘집에 들어가 배를 채우고 고베로 향했다. 오후 네 시가 다 되어 출발. 강 위에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한 석양과 함께 고베로 저물어 갔다. 고베는 오사카의 서쪽에 있다. 오렌지 빛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전차에서 잠시 내리고 싶어 졌다. 다음 역은 마침 '슈쿠가와(夙川)'였다. 하루키는 교토에서 태어나자마자 슈쿠가와로 이사를 갔다.
슈쿠가와 역에 내리니, 역 앞에서 모금활동을 하고 있는 학생들과, 빅이슈를 팔고 있는 아저씨, 나들이를 다녀온 듯 한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에 들어가니 미용실 의자에 누워있는 아주머니의 발도 구경했다. 토요일의 저녁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도 끝나가는구나’하는 아쉬움과 주말의 행복함이 동시에 전해오던 그때에 나는 강을 따라 걸었다.
영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주인공이 배경음악 캘리포니아 걸스(Calidornia Girls)에 맞춰 경쾌하게 걷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항구에서부터 걸어 모토마치 상점가(元町商店街) 레코드샵에 들어가는데, 소설 속 '나'도 항구 근처를 거닐다가 눈에 띈 레코드 가게에서 일주일 전 바에 쓰러져 있던 여자를 우연히 만난다.
“어떻게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걸 알아냈지?”
그녀는 체념한 듯이 그렇게 물었다.
“우연이야. 레코드를 사러 온 거라구.”
“어떤 레코드?”
“<캘리포니아 걸스>가 들어 있는 비치 보이스의 LP.”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중에서
나는 슈큐가와에서 다시 전차를 타고 산노미야 역에서 내려서, 영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속 주인공과는 반대로 모토마치 상점가를 거쳐 고베 항구의 밤을 향해 걸어갔다. 상점가는 활기찼고, 항구는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풍경이었다. 항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고베 포트 타워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항구에 즐비한 식당 중 하나에 들어가 식사를 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저녁 식사를 하고 싶은 식당은 따로 있었다. 주문하는 피자마다 번호를 매겨주는 피자집 피노키오. 하루키도 고베 여행 중 이곳을 방문하였고, 여행기엔 여자 친구와 몇 번인가 가서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번호가 딸린 피자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고 적혀있다. ‘하루키도 맛 본 피자를 먹으러 간다’는 기대에 부풀어 한참을 걸어서 피자집에 도착했다. 여러 방면에서 유명한 가게인 줄은 알았지만, 나는 줄조차 서보지도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다. 종업원은 예약이 이미 꽉 찼고 기다려도 자리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구석에 비어 있는 자리에 앉을 순 없는지’ 묻자, ‘예약석이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슬쩍 들여다본 가게 안은 크리스마스 저녁을 닮아 있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주고받으며 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도 쉽게 자리를 뜨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허망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하루키는 피노키오 레스토랑에서 헤밍웨이의 《해는 다시 떠오른다》를 읽었다. 나도 이번 여행엔 같은 책을 챙겨갔다. 『해는 다시 떠오른다』에는 전쟁 후 성불구가 된 주인공 제이크와 그의 연인이었던 브렛, 마이크와 콘 등 젊은이들이 등장하고 사랑한다. 주인공들은 매일 저녁 파리의 술집과 카페를 전전하면서 술을 마시고 헛헛한 나날을 보낸다. 이들의 모습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속 ‘쥐와’ ‘나’의 모습과도 겹쳐졌다. 하루키는 어디선가 이 작품을 '술을 부르는 소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피자를 못 먹은 나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잔뜩 사서 숙소로 돌아가 소설을 읽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재킷을 벗어 뒷좌석에 던지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럼, 어디로 갈까?”
“동물원.”
“좋지.”
내가 말했다.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중에서
나에겐 나흘간의 여행 마지막 날 반나절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어딜 가볼까 고민하다가 판다가 있다고 하는 동물원에 가보기로 했다. 소설에서는 ‘쥐’가 동물원에 가자고 제안하는데 그치지만, 영화에는 ‘나’와 ‘쥐’가 고베시에 있는 오지 동물원(王子動物園)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들어있다. 판다 '탄탄'이 무기력하게 퍼져있었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와 탄탄이 ‘쥐’와 ‘나’의 모습 같기도 했다. 탄탄 곁에는 원래 '싱싱'이라는 수컷 있었지만, 2010년에 죽었다고 한다. 다른 판다 친구가 와서 부디 탄탄이 활발해지길 바라며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산노미야역 근처 정류장으로 향했다. 주인공 ‘나’도 같은 곳에서 버스를 타고 도쿄로 돌아가며 영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