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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Jul 18. 2016

숲 속에 답이 있었다

핀란드 헤멘린나, 다자키 쓰쿠루의 발자취를 따라


“헤멘린나에는 아름다운 호숫가 성과 시벨리우스의 생가가 있지만, 아마 다자키 씨한테는 그보다 더 중요한 볼일이 있을테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인 내가 핀란드 여행에서 가장 집착 증세를 보인 도시는 헤멘린나 Hämeenlinna 였다.  가장 좋은 날씨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여행의 감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헤멘린나에 가고 싶었다. 


그리곤 날씨와 감성의 조건이 충족한 바로 그 날. 

배탈이 났다. 



그것도 내 생애 겪은 배탈 중 가장 극심한 복통을 동반. 오장육부가 뒤엉키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행지에서는 늘 생수를 사먹곤 했는데, 사우나를 하면서 수분보충을 위해 사둔 생수가 부족하여 (먹어도 괜찮다고 하는 핀란드의) 수돗물을 벌컥벌컥 마신 탓이었다. 지난 며칠간 먹은 모든 것을 쏟아냈다. 

헤멘린나역


헬싱키에서 헤멘린나로 향하는 오전 10시 6분 기차를 기어서 5분에 탔고, 7번 칸 자리였는데 더이상 기어갈 힘 조차 없어서 한참 먼 식당칸에 엎어져 있다가 화장실에서만 40분을 보냈다. (차라리 화장실석을 예약할 것을 그랬다.) 


헤멘린나는 헬싱키에서 약 100km 떨어진 도시다. 기차로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동행한 친구는 계속해서 중간에 내려 헬싱키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당시는 헤멘린나에 꼭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 중간역에서 내려 걸어서 반대편 열차를 타러 갈 기운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냥 엎어져 있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도착해서 처음 찾아간 곳은 하루키 소설 속 숲도, 호수도 아닌 약국이었다. 약을 먹고 걷다가 지치면 쉬어가며 하루를 보냈다. 덕분에 느릿느릿 헤멘린나를 온전히 바라보았다.


헤멘린나 성



홀 로  색 채 가  없 었 던  다 자 키 쓰 쿠 루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는 주인공 쓰쿠루가 대학교 2학년 여름, 가장 친했던 친구 다섯 명의 그룹으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퇴출당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십 여 년 후 퇴출의 이유를 밝혀나가는, 즉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순례의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일본의 나고야, 하마마쓰, 도쿄, 그리고 핀란드의 헬싱키, 마지막엔 헤멘린나까지…….



각 도시가 매우 인상 깊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과 함께 도시순례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다섯 도시 중 일본에 있는 나고야, 하마마쓰, 도쿄는 순방할 기회가 있었다. 순례의 마지막 친구 구로를 만나는 헤멘린나를 못 가본 것이 마치 홀로 색채가 없었던 (이름 중 색이 있는 한자가 없었던) 다자키 쓰쿠루의 심리 마냥 아쉬웠다. 


핀란드 여행은 그 아쉬움을 해소할 여행이었다.  




헬싱키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카모메식당>에 이런 장면이 있다. 오랫동안 부모님 간병으로 시간을 보낸 마사코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겨우 자유가 생겨 헬싱키에 가게된다. 카모메식당에서 마사코가 “왜 핀란드인은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일까요?”라는 질문을 하는데, 핀란드청년 토미가 답한다. 


“핀란드에는 숲이 있어요.”


그 말을 듣고 곧장 숲으로 향한 마사코처럼, 나도 핀란드의 숲에 꼭 가보고 싶었다. 마침 헤멘린나엔 근사한 숲이 있다.





자작나무 가지 사이로 호수가 보였다. 작은 방파제 같은 게 있고, 겨자색 플라스틱 보트가 한 대 묶여 있었다. 낚시용 작은 보트였다. 나무들에 둘러싸인 아담한 목조 오두막이 있고, 지붕에는 사각형 벽돌 굴뚝이 솟아올랐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중에서




전 원 풍 경 이  불 러 일 으 키 는  영 문 모 를  슬 픔


소설 속에서 구로가 가족과 휴가를 보내는 헤멘린나 근교에 있는 숲. 아마 아울란코 Aulanko 부근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이탈라 글라스 센터에서 쇼핑을 하고 싶다는 친구를 보내고, 혼자 아울란코행 버스를 탔다. 광활한 숲이 펼쳐져 있는 아울란코는 핀란드 사람들이 여름휴가로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하는데, 이상하게 내가 간 날에는 사람이 없어서 무서웠다.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 Granite Castle 부근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 이대로 가야 할지, 그냥 돌아갈지. 나는 굉장한 겁쟁이다.


마침 한 핀란드 가족이 숲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에게 의지하면서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들이 시야에서 멀어지면, 조금 참으며 걷다 만나는 다른 가족들에게 의지하고, 또 다시 의지하면서……. 의지의 대상을 배턴터치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프란츠 리스트가 여행의 기억을 곡으로 풀어낸 작품집 <순례의 해> 중 '르 말 뒤 페이 Le Mal du Pays.' 다자키 쓰쿠루는 친구들 한 명 한 명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만남의 마지막 즈음에 자살한 시로가 즐겨 연주하던 ‘르 말 뒤 페이를 기억하는지’ 묻는다. 르 말 뒤 페이는 우리말로 '향수' 혹은 '멜랑콜리'로 번역되곤 하는데, 정확한 의미는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내가 걸은 아울란코의 숲은 ‘르 말 뒤 페이’의 의미를 충분히 품고 있었다. 혼자 걷고 있는 나는 괜히 울컥 했다. 신경 써야 하는 사람도 없고, 여비가 부족하지도 않았고, 속이 조금 불편했지만 꽤 걸을 수 있는 체력까지 있었다. 길 위엔 백조와 새끼들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 붉은 얼굴을 한 핀란드 가족들은 그들이 지나가기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 풍경 뒤로는 호수가 반짝거리고 있었고, 숲이 울창했다. 그곳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감정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문도 모르게 슬펐다.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1.8km 정도 걸어가면 숲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타워 Aulangon näkötorni 가 하나 있다고 해서, 걸어가 보았다. 3km는 걸은 듯 했지만 타워는커녕, 나무들 때문에 높은 건축물이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둘째라면 서러울 방향치인 나는 숲 안에서 같은 장소로 서너번 가량 돌아왔다. 


정말 다리가 끊어질 것 같던 순간. ‘돌아가자!’ 마음 먹었는데,  그럴 때는 늘 친절하고 용기를 주는 아주머니가 등장한다. 



“노! 잉글리쉬! &^%$#@” 

손짓으로 타워를 만드니, 

핀란드어로 ‘얼마 안 남았으니 앞으로 가’라고 한다. 

어떻게 알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알아 들어 다리를 질질 끄니 타워가 보였다. 




타워 바로 밑에는 매점이 하나 있었다. 오전에 모든 것을 쏟아내곤 배 안에 아무 것도 넣질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왜 콜라가 마시고 싶은지……. 






매점에서 콜라를 한 병 샀다. 

(사실 타워를 오를 기운이 전혀 없었다. ) 


콜라를 마시고 앉아 있었다. 

(나는 평소에 콜라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 


딱 콜라 한 잔 마셨는데! 

(아마 15분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파란색이었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무서운 속도로 몰려들었다. 켜켜이 쌓여 회색, 검은색으로 변해간다.


타워에 오르니, 검은 숲이 되어있다. 

하아. 




이번 여행 열흘 동안 단 한 순간도 날씨가 흐린 적이 없었다. 계속되는 맑은 날씨, 푸른 하늘, 눈부신 물빛에 너무 운이 좋은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런 순간들이 계속 되다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매몰차게 몰려든 구름. 콜라 한 잔으로 푸른 하늘 아래 싱그러운 초록빛 숲 전경을 놓치고 말았다.


'뭐 그런 거지.' 

태연하게 굴고 싶었지만 혹시 구름이 없어지지는 않을 까 20분 동안 그 높은 곳에 마냥 서 있었다. 




포기하고 내려와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밤 11시 반까지도 환한 백야의 핀란드이지만, 구름이 끼니 숲은 무시무시하다. 의지했던 가족들도 다들 어디로 들어갔는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백조가족들이 남아 있어서 이들에게 무한정 의지했다. 그리곤 버스시간을 잘 못 보아 물가 높은 나라에서 택시를 타게 된 비교적 귀여운 에피소드로 일정을 마감하며 생각했다. 



헤멘린나행.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도로 양쪽은 거의 숲이었다.

국토 전체가 싱싱하고 풍성한 녹음으로 덮인 듯한 인상이었다.

대부분 자작나무고 소나무나 가문비나무나 단풍나무가 섞였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중에서 






[부록] 하루키의 답장을 받다




일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기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습니까. ラオスにいったい何があるというんですか?』 가 새로이 발간되었다고 하여 주문을 하였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일본 여객기 JAL의 기내지인 ‘아고라 Agora'에 연재되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그의 후기에 따르면 사진 중심의 기내지엔 들어가는 문장분량이 굉장히 적어 긴 버전과 짧은 버전을 써두었고, 짧은 버전이 기내지에 실렸다. 이번 단행본에 수록된 것은 당시 함께 써둔 긴 버전의 여행기라고.

목차를 읽어 내려가던 중 핀란드 여행기가 있단 사실에 극도로 흥분했는데, 단지 핀란드, 헬싱키만이 아닌 헤멘린나가 있단 사실을 알고 정신줄을 놓을 뻔 했다. 이유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속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느낀 헤멘린나가 아닌, 무라카미 하루키가 느낀 헤멘린나 이야기가 늘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녀온 이 장소에 대한 감상을 하루키의 긴 문장으로 들어보고 싶었다.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하루키와 독자간의 대화' 이벤트 때는 질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답변을 받았다.




- 나의 질문

핀란드의 도시, 헤멘린나에서 느낀 바가 궁금합니다.

해외에서 하루키 씨의 소설을 빠짐없이 읽고 있는 팬입니다. 3 년 전부터 회사에서 휴가를 얻으면, 하루키 씨의 소설 속 배경이 된 곳을 순례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 인생에서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최근 다녀온 곳은 핀란드 헤멘린나입니다만, 근교의 숲을 산책해 보기도 하고, 시내를 걸어 보니, 소설에 묘사된 것들을 직접 느껴볼 수 있어 무척 즐거웠습니다.

"가보지 않은 곳도 상상력을 발휘하여, 소설의 배경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헤멘린나도 소설을 쓴 후 방문하신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실제로 가본 후의 감상을 듣고 싶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하루키 씨의 소감이 신경 쓰여 잠을 이룰 수 없으므로, 무라카미 씨, 한마디 해주시면 기쁩니다.
- 하루키의 답변

헤멘린나. 네, 가보지 않고 썼습니다 (웃음). 지도만 보고 적당히 쓴 것입니다. 소설을 쓴 후 (출판되기 전에) 가보고, 여기 저기 둘러보니 상상과 거의 동일했기 때문에 안심했습니다. 

단지 수목의 종류 정도는 달랐기 때문에, 그것은 다시 썼습니다. 그리고 제가 설정했던 호숫가의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그 부분도 수정했습니다. 광장 장면도 실제에 맞게 조금 수정했습니다.

가장 놀란 것은 제가 헬싱키에서 빌린 렌터카가 우연히 감색 폭스바겐 골프였던 것. 소설과 똑같았지요. "어!"하고 놀랐습니다. 이런 일이 있구나. 신기합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속 핀란드 장면을 전부 상상으로 써버린 후에 이번 핀란드 취재를 갔습니다. 왠지 스스로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더듬어 가듯. 그런 의미에서 흥미로운 여행이었습니다.

-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습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중에서



나에게도 헤멘린나는 농도 짙은 하루였다. '하루만 보내고 돌아가긴 아깝다' 싶은 당일치기 여행이었고, 헬싱키에서의 여러날보다 선명하게 기억하고 오래 추억할 것 같다. 하루키의 발자취를 좇을 수 있어서 행복했고, 그리고 계속해서 어디 한 구석이 그와 연결되어 있는 듯하여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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