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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Apr 09. 2024

새들이 지저귀는 깊은 산속에서 아마다의 아틀리에를 찾아

<기사단장 죽이기>의 배경, 오다와라 이리우다


귀에 꽂은 에어팟에서 오디오북 <기사단장 죽이기>가 들려온다. 도쿄 시나가와에서 기오이초를 향해 걷고 있다. 친구의 근무지 근처에서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난 탓에 러닝을 하고 조식을 먹고도 약속시간까지 2시간이나 남았다. 시간을 더 어떻게 죽이지… 고민 끝에 약속 장소까지 7km 정도 되는 거리를 그래, 한 번 걸어가 보자. 한 것이다. (이미 조깅으로 8.8km를 뛰고 난 다음이었다.)


이러다 슬슬 다리가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던 찰나. 눈앞에 약속 장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 풍경은 아카사카였다. 그리고 정확히 ‘아카사카’란 지명이 귀에 선명히 귀에 꽂혔다. 신기하게도.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녀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 일주일 후였다(생일에 긴자의 레스토랑에서 같이 식사를 했는데, 그때 그녀가 여느 때와 달리 말수가 적었다는 사실을 그는 나중에야 떠올렸다). 당시 아카사카에 있던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전화로, 잠깐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 그쪽으로 가도 괜찮은지 물었다. 물론 괜찮다고 그는 말했다.



두툼한 분량의 2권으로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그리 핵심 장소도 아닌 곳인데, 마침 딱 아카사카라니.


사실 <기사단장 죽이기> 배경여행을 가야겠다 생각한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소설은 출간이 되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역시 이번에도 비슷한 전개군. 하면서도 하루키가 그리는 소설의 무대는 여전히 매력적이라 배경이 된 오다하라엔 꼭 가봐야겠다 생각했다. 이후에 몇 번의 기회는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다 기나긴 팬데믹의 시기를 보내고, 하늘길이 열리고 나서도 한참 뒤에나 이젠 진짜 가봐야 할 마음이 든 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출간 소식을 듣게 된 것이 계기였다. 만약 새 작품의 배경도 매력적이라면 숙제가 두 개나 생겨버리는 일이 되니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는 현실 세계와 비현실 세계, 두 개의 배경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비현실 세계가 너무나도 매력적이라 모델이 된 도서관이 있다고 하는 현실 세계의 배경에는 당장 가볼 마음이 들지 않는다. 기우였다.)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에서 사용하는 소재, 메타포, 설정 등 모든 장치를 등장시킨 하루키의 백화점과도 같은 소설이다. 주인공은 아내로부터 갑작스럽게 이혼을 통보받은 삼십 대 중반의 초상화가인 ‘나’. 아내와 함께 살던 집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자, 친구 아마다의 마침 비어 있는 아틀리에에 머물게 된다. 아틀리에는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유명 화가인 아마다의 아버지가 요양 시설에 가기 전까지 생활하며 작품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근처에는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를 연상케 하는 멘시키란 인물이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핏줄일지도 모르는 13살의 소녀 마리에를 지켜보기 위해 산골짜기에 커다랗고 화려한 집을 사들인 세련된 중년의 남자로 주인공과 가깝게 지내게 된다.

아카사카를 지나 기오이초에서 친구와 맛있는 점심을 먹은 나는 다음날 도쿄에서 출발해 <기사단장 죽이기> 속 인물들이 생활하는 산골짜기 이리우다 入生田 로 향했다. 이리우다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집에 들러보기로 했다. 이렇게 쓰면 마치 약속을 하고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마침 가는 길에 그의 집이 있단 사실을 알게 되어 외관만이라도 구경을 해보려는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 살고 있는지는 (하루키는 아오야마에도 멘션이 있다고 하고, 주기적으로 하와이에 거주하기도 하는 듯하다.) 모르겠지만 문패에 정직하게 ‘무라카미’라 쓰여 있다. ‘시나몬 자료실’이라는 집의 애칭인지 뭔지 모르겠는 타이틀 아래. 함께 간 남편은 세계적인 소설가치고는 소박한 집이라 놀랐다고 하지만, 사실 연예인도 아니고 강연이나 행사에 얼굴을 자주 비추는 인물도 아니고 인세를 주 수입원으로 살고 있는 작가이니 (물론 일본에서 상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톱클래스지만) 난 이 정도가 딱 적당한 집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들어가 볼 수도 없는 집 주변에서 너무 어슬렁거리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 주변 마을 구경이나 잠깐 하다가 이리우다가 있는 오다이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의 마을 분위기는 참 좋았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달리고, 수영하고, 음악을 듣고, 일찍 잔다고 하는 하루키의 일상에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하루키가 어린 시절을 보낸 한신칸을 떠올리게도 하고.


오이소에서 이리우다까지 차로는 30분, 기차로는 40분이면 닿을 수 있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배경이 왜 그토록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지 이해가 된다. 하루키의 삶의 터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을 소설의 주 무대로 삼은 것이다. 두 곳 모두 한적함에 하품이 밀려들어오고 눈꺼풀을 무겁게 하는 장소들이다. 두 마을 모두 바다가 가까이에 있고 마을 뒤에 커다란 산을 두고 있어 집들이 높은 언덕 위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있는 점도 비슷했다. 물론 이리우다가 훨씬 더 시골이다. 마주치는 사람보다 새들이 더 많을 정도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집도 많아 보인다. 별장이나 세컨드 하우스 혹은 정말로 빈 집이 되어버린 곳. 그나마 생활의 향기가 느껴지는 역 근처 마을을 지나 오르 시작한 산행 길. 산 속 깊이 들어갈수록 지저귀는 새들의 종류가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아, 한 가지 분명히 할 점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구체적으로 이리우다란 지명이 등장하진 않는다. 소설 속 몇 가지 힌트를 통해 일본의 몇몇 매체에서 이곳으로 짐작된다고 기사를 썼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이러한 짐작들은 대략 맞아떨어져 왔다.)


일단 깊은 산속까지 들어오긴 했는데 어찌 됐든 허구의 무대이다. 정확히 일치하는 아틀리에 나 멘시키의 흰 저택이 눈앞에 나타날 리 없다. 이제부턴 그냥 대략 비슷한 건물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다니며 산책을 할 뿐이다.


언제나처럼 남편은 곁에서 “어떤 건물이냐?” “어느 스폿이냐”를 계속 묻고 있다. 그러니까… (매번 이야기하지만) '그냥 이 공간을 느끼면 되는 거라니까...'


(약간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지만) 멘시키가 지켜보는 마리에라는 소녀는 초상화가인 주인공 ‘나’의 모델이 되며 가까워진다. 소녀는 어릴 때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의 구석구석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자신만이 아는 비밀통로를 이용해 주인공의 집까지 걸어서 방문을 하곤 한다. 그 비밀통로로 묘사된 길이 산속 곳곳에 있었다. 이 길도 소설에 나온 길 같고 저 길도 나온 것 같고. 걸으면 걸을수록 소설 속 장면들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해졌다. 계속해서 정처없이 걷다보니 주인공이 머문 아틀리에를 떠올리게 하는 건물도 마주치게 된다. 이 공간 어딘가에 소설에 등장하는 수리부엉이 혹은 작품 한 점이 숨겨져 있진 않을까. 그러다 멘시키가 살고 있는 흰색 저택 같은 건물이 멀리 감치 보이기라도 하면 여행의 흥분이 가중된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니 흰 건물은 큰돈을 벌어 이른 나이에 은퇴한 인물이 호화롭게 살고 있을 법한 대저택은 아니었다. 그래도 하루키는 이런 소재 하나 하나에 점점 살이 붙여 소설을 완성했을 것이다. 한 시간 넘게 걸었더니 남편이 얼린 칼피스를 녹이려고 음료수 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더운 날씨에 목이 마를테고 몹시 지루한 모양이다. 슬슬 돌아가자고 했다. 내려가서 맥주나 한 잔 시원하게 마시자.



생각해 보니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주인공이 이곳에 머물기 시작한 계절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내내 비 내음 나는 듯 빗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니까. 그래도 내려가는 길엔 산바람이 마치 선풍기를 세기 ‘강’으로 하여 틀어 놓은 것처럼 시원하게 불어 장마철 습한 공기를 최선을 다해 날려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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