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속 "술" 배경여행
작년에 도쿄 신주쿠에 있는 더그(dug)에 간 적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많을 땐 매주 신주쿠로 출장을 갔던 시기라, 무라카미 하루키 팬이라면 한 번쯤은 방문하는 더그를 자연스레 갈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노르웨이의 숲》의 미도리가 다섯 잔이나 마시곤 계단에서 비틀댔던 칵테일을 ‘톰 콜린스’로 기억해 톰 콜린스를 두 잔이나 마셨다. ‘이 정도라면 나도 다섯 잔은 마실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대학생이 다섯 잔이나 마셔댈 가격은 아닌 것 같다’며 적당히 마시곤 호텔로 돌아갔다. 톰 콜린스는 레몬을 좋아하고, 달달하면서도 쓴 맛도 같이 나야 하는 내 입맛에 딱 맞는 칵테일이었다. 진에 레몬주스, 탄산수를 넣어 제조하기 때문이다. 하루키 소설 속 술을 정리한 조승원 작가의 저서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에 따르면 더그는 흔히 쓰는 '런던 드라이 진'이 아닌 ‘올드 톰 진’을 사용해서 좀 더 달고 촌스러운 맛이 난다고 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그 둘의 차이를 알리는 없고. 미도리가 다섯 잔이나 마신 칵테일이 보드카 토닉이었던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더그에 다시 가서 보드카 토닉을 마셔야지, 다시 가봐야지 하다가... 출장은커녕 출근조차 불투명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두 달 가까이 되어가는 재택근무. 당분간 보드카 토닉을 맛 볼 기회는 없겠구나 하는 아쉬움에 마트에 가서 더그에서도 사용한다는 '스미노프 레드'를 사 와 집에서 홀짝여본다. 나의 몹쓸 입맛은 톰 콜린스와 보드카 토닉의 차이도 모르겠어서 더그의 보드카 토닉을 향한 미련은 말끔히 떠나보냈다. 어차피 《1Q84》의 아오마메도 톰 콜린스를 마셨더랬다. 톰 콜린스 장면까지 도달해 보려고 《1Q84》 1권을 다시 읽기 시작하다가, 나는 오랜만에 커티삭 위스키를 만나게 된다.
남자는 문득 생각난 듯 커티삭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바텐더는 말했다. 나쁘지 않아,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게 시바스 리걸이나 까다로운 싱글몰트가 아닌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바에서 필요 이상으로 술의 종류에 집착하는 인간은 대개의 경우 성적으로 덤덤하다는 게 아오마메의 개인적인 견해였다. - 《1Q84》중에서
아오마메는 《1Q84》에서 전문 킬러로 등장하는데, 아무나 죽이는 건 아니고, 여성에게 폭력을 가한 남성들을 죽인다. 소설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살인을 마치고 그녀가 향한 곳은 아카사카의 고급 호텔 바. 이곳에서 ‘커티삭 하이볼’을 주문하는 중년 남자를 보게 된다. 그의 두상이 마음에 든 아오마메는 그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접근한다.
아오마메. "커티삭을 좋아해요?"
남자. "아 네, 커티삭." "옛날부터 라벨이 마음에 들어서 자주 마셨어요. 돛단배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아오마메. "배를 좋아하는군요."
남자. "음 그래요. 돛단배를 좋아합니다."
이 장면에서 나는 책을 덮었다. 커티삭의 맛이 너무 궁금해서 더 이상의 문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커티삭...!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에는 커티삭을 찬양하는 하루키의 시가 실려 있다.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까지 곁들인 이 글을 처음 봤을 때도 무슨 맛인지 너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는데, 나는 위스키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한국에서는 당연 구할 수 없으리란 생각으로 단념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혹시나 해서 검색을 했다가 마트나 주류 상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정보를 접하곤 주변 주류 상점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몇 번의 통화 끝에 커티삭을 손에 넣게 된다! 신이 나서 커티삭 하이볼 제조에 들어갔다. 하이볼은 위스키에 소다수-토닉워터, 진저에일, 탄산수 무엇이든 관계없단다-를 넣고 레몬을 짜기만 하면 되어서 집에서도 쉽게 제조할 수 있다. 그러나 커티삭의 뚜껑을 열고 향을 맡은 순간 깨달았다. 위스키는 내가 이제까지 가장 혐오해 온 ‘양주’였단 사실을. (이런 이야기를 하면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질타를 받겠지만.)
내가 처음 양주 맛을 본 건 대학생 때였다. 당시 한 언론사에서 인턴기자를 했다. 거의 매일 같이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에, 얼음도 타지 않은 양주에, 양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까지... 몇 잔씩 마시곤 인사불성이 되어 퇴근을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혹은 돌아가는 과정 중에(......) 쏟아낸 구토와 함께 올라오는 냄새. 바로 그때 그 냄새! 였던 것이다. 당시 40,50대 남자 선배들이 밸런타인이고 시바스 리걸이고 17년 산이라는 둥, 21년 산이라는 둥, 얼마짜리고, 역시 향이 다르다고... 으스대며 마셔보라 권유(인지 강요인지)했지만 나에게 양주는 그저 토 냄새로 기억되는 술이었다. 몇십만 원을 주고 이걸 마셔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고, 그때 그 강렬한 양주의 경험이 뇌리에 박혀 웬만하면 양주는 피해왔다. 어쩌다 마시게 되어도 올라오는 그 냄새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나는 커티삭의 향을 맡기 전까지 어딘지 모르게 세련된 느낌을 주는 ‘위스키’ ‘커티삭’이란 소리의 울림 때문에 이 술이 양주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궁금해 꿈에서까지 그리던 커티삭이 이 향이었다니. 적잖이 실망했다. 남편(함께 인턴을 했던 그는 기자가 되었다)에게도 향을 맡아보라고 했더니 “아아 아니. 이것은 출장 다녀오는 길에 부장 선물로 사가면 그날 회식에 등장하여 결국 내가 마시게 되는 바로 그 술의 향기 아닌가.”란다. 역시...!
어찌 되었든 궁금함은 해소해야 해서 두상이 예쁜 아저씨가 마신 커티삭 하이볼을 제조해서 마셔보았다. 위스키의 강한 향이 레몬 뒤에 슬쩍 숨어 드문드문 나고, 음료계의 단짠단짠이기도 한 토닉워터 덕분에 주스를 마시듯 편하게 넘어갔다. 충격적이었던 커티삭 향기와 달리 하이볼은 꽤 만족스러운 맛이어서 한잔을 더 만들어 마셨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번 도쿄행에선 아카사카의 호텔에서 커티삭 하이볼을 마셔봐야지. 그리곤 다시 《1Q84》의 독서를 재개했다.
아오마메는 ‘커티삭 하이볼’을 주문한 남성에게 들리도록 ‘커티삭 온더록’을 주문한다. 아... 이런. 커티삭 온더록도 마셔봐야겠구나. 곧바로 컵에 얼음을 담고 커티삭을 부어 마셔본다. 얼음 덕분에 향이 조금 은은해졌지만 여전히 양주의 향기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래서 첫 단추가 중요하다.) 물을 부어 미즈와리로...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도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 아니면, 예를 들어 《양을 쫓는 모험》에서 친구 ‘쥐’의 죽음을 마주한 ‘나’라든지, 나오코를 떠나보낸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 정도가 아니면 스트레이트 보단 하이볼이나 온더록, 미즈와리 정도로 위스키를 즐기는 듯하니까. 나도 하이볼에서 만족하기로. 이 정도가 내겐 딱 좋다.
그나저나 왜 양주하면 촌스러워 보이고, 위스키, 하이볼은 세련돼 보이는 걸까. 나만 그런가.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칵테일 이야기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