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댄스 댄스 댄스⟫ 배경여행 1. 하와이 와이키키
처음 보았을 때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동차와 사람들이 넘쳐나고 호텔은 왜 이렇게 낡고, 불친절한지. 심지어 거리에 걸린 오키나와 페스티벌 현수막은 뜬금없다. 우리가 가장 실망했던 여행지 나하를 떠올리게 했다. 정말 ⟪댄스 댄스 댄스⟫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비행기표를 바꿔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귀국을 하루라도 앞당길 수 있을까 항공사 사이트에 접속해보았다. ⟪댄스 댄스 댄스⟫에 나온 바에만 들렀다 돌아가버리자.
하와이에 가보고 싶다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남편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이직을 앞두고 긴 휴가를 보내고 있던 나는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편에게 무리한 여행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릴 때 이미 하와이를 다녀온 남편은 그곳이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기억하고 있다. 아니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인상에 남지 않는 관.광.지.라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하루키의 몇몇 작품과 문장에 무척이나 꽂혀 있었기 때문에 하와이 외에 다른 여행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몇 차례 설득 끝에 하와이에 도착했고, 나는 와이키키 중심가에 서서 남편의 의견에 백 퍼센트 동의했다.
일단 숙소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번 하와이 여행에서 내가 가장 중요시했던 일정은 카우아이섬이었고, 그 섬 안에서도 특히 하날레이 베이였다. 하날레이는 가장 최근에 만난 하루키의 문장ㅡ<뽀빠이>란 잡지에 실린ㅡ 속에 담긴 장소였고, 그곳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곧 일본에서 개봉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카우아이에서의 닷새를 제외하고, 오아후에서 머물기로 한 두 밤은 돈을 많이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비즈니스호텔급의 잠자리를 예약했다. 아마 그동안 내가 너무 일본만 오간 탓에 여행의 감각이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미국. 게다가 하와이. 돈이 지배하는 이곳. 숙소는 딱 지불한 돈에 걸맞은 공간이 제공되었다. 침대엔 머리카락(이길 바라고 싶은 털)이 앉아 있었고, 분명 청소를 했을 터인데 샤워기 옆엔 반창고가 떡하니 붙어있었다. 냉장고는 우렁차고 가스레인지엔 녹이 잔뜩 슬어 있다. 남편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외출복을 입은 채 대충 누워 잠이 들었다.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 시작한다. 호텔 예약 사이트를 뒤졌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체인 호텔에 스위트룸이 비어있음을 확인했다. 이곳보다 15만원을 더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 길로 프런트에 내려가 “내일 밤도 예약을 했지만 내일은 숙박하지 않으려 한다. 얼마를 환불받을 수 있냐” 따위의 질문을 했다. 다행히 전액을 돌려받을 수 있단 답변을 듣고 올라와 다른 호텔을 예약했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최대한 아침 일찍 길을 건너 그곳으로 갔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지난밤 제대로 씻지 못한 나는 기분 좋게 시간을 들여 샤워를 했다. 나는 어지간하면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어쨌든 ⟪댄스 댄스 댄스⟫ 배경 여행을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1988년에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 ⟪댄스 댄스 댄스⟫의 주인공은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나.’ 하루키의 초기 3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의 속편과도 같은 작품이다. ‘나’는 ‘키키’란 매춘부를 만나러 ⟪양을 쫓는 모험⟫의 주요배경인 삿포로의 이루카 호텔을 다시 찾아간다. 그곳에서 일하는 ‘유미요시’란 여자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소녀 ‘유키’를 만나게 된다. 80년대 일본의 도쿄, 삿포로, 쓰지도를 배경으로 고도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유키와 주인공이 유키의 엄마를 만나러 가는 하와이. 고도 자본주의 사회를 그리는데 필수 불가결한 배경이었을 것이다.
하와이에 도착한 유키와 주인공 ‘나’는 유키의 아버지가 예약해준 아파트에 머물며 맛있는 밥을 해 먹고, 파도를 타거나 수영을 하거나 해변에서 뒹굴며, 그리고 할레쿨라니나 로열 하와이안 호텔에서 피나콜라다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낸다. 때때로 유키의 엄마를 만나러 간다. 우린 할레쿨라니에 가보기 전에 호텔 앞 포트 드루시 해변 공원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이곳은 예상대로 그저 그랬다. 횟집이 줄지어 있고, 모래사장에 술병이 뒹굴고 있지 않는다는 점을 빼면 우리나라의 해변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물이 조금 더 맑고, 파라솔이나 해변의자를 빌리는 자릿세가 없다는 점이 다르다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돈을 받는 자리도 있어 보였다. 어쨌든 이곳에서 유키와 주인공은 자리를 깔고 누워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거기서 일주일 동안 한가로이 지내면서 실컷 수영을 하고, 피나콜라다를 마시고 돌아온다. 피로도 가시고, 기분 전환도 되겠지. 햇볕에 그을린 몸으로, 새롭게 시점을 바꾸어 사물을 다시 보고 생각하는 방법이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 이렇게 생각하리라. 그래,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도 있군, 하고. 나쁘지 않다.
ー무라카미 하루키, ⟪댄스 댄스 댄스⟫ 중에서
⟪댄스 댄스 댄스⟫의 주인공 ‘나’는 ‘키키’를 찾아 헤매다가 여러 인물을 만나게 된다. 새단장을 한 이루카 호텔 프런트에서 근무하는 '유미요시'를 시작으로, 그 호텔에 머물던 '유키'. 그리고 키키가 엑스트라로 출연한 영화의 주인공을 연기한 '고탄다'. 배우 고탄다는 주인공의 동급생으로, 또 다른 매춘부 ‘메이’를 소개해준다. 그러다 ‘메이’가 갑작스레 살해되며 '나'는 경찰 조사를 받는다. 경찰서에서 치른 곤욕으로 피로가 좀처럼 가시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묘한 만남들에 지쳐가던 '나'에게 때마침 유키가 하와이행을 제안한다.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로마에 체류하며 썼다고 하는데, 그때 머문 방이 너무 추워서 하와이를 등장시켰다고 한다.‘하와이의 장면을 쓰다 보면 아주 조금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먼 북소리> 중에서) 하와이는 여러 이유에서 등장해야했던 것이다.
할레쿨라니는 확실히 비싸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호텔이었지만 그리 친절하진 않았다. 할레쿨라니의 비치 바에 석양이 내려앉기 전에 잘 도착했고, 분위기는 소설 속 묘사만큼이나 근사하고 우아했다. 처음엔 뒷자리에 광둥어를 쓰는 중국인 가족들이 일초도 쉬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고 있어서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무대 위 연주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다행히 30분 정도를 내내 떠들다 석양이 떨어지기 직전에 자리를 떴다. 앞에는 우리처럼 연주자들 곁으로 해가 넘어가기만을 기다리는 일본인 커플이 있었다. (이 자리 배치는 동아시아 지도를 고려한 것인가.)
그리고 주인공이 몇 잔이나 마셔댄 이곳의 피나콜라다는 정말 맛있었다. 술이 세지 않고 아주 달콤했고, 하와이의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여러 꽃냄새들과 잘 어울렸다. 지금 막 떨어지고 있는 석양의 빛줄기 가장 끝을 닮은 색을 띠고 있다. 언젠가 칵테일을 다시 마시러 간다면 꼭 이걸 마셔야지 생각했다. 물론 이 꽃향기와 석양빛 없이도 같은 맛이 날까.
저녁 때마다 나와 함께 지내면, 일주일 만에 너는 일본에서 피나콜라다에 제일 밝은 중학생이 될 거야.
ー무라카미 하루키, ⟪댄스 댄스 댄스⟫ 중에서
⟪댄스 댄스 댄스⟫ 배경여행 2편. 마카하 가는 길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istandby4u2/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