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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Aug 06. 2024

입 안 가득 감도는 진하고 신선한 달걀의 맛과 향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에서 하루키가 방문한 포틀랜드 히스먼호텔

이번 미국 여행은 정말 오랜만에 한때 매일 밤 책을 읽고 작품의 배경이 된 곳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다녀와 글을 쓰고 사진을 정리하며 무라카미 하루키에 흠뻑 빠져 지냈던 나날들의 감정을 몇 번이고 상기시키게 해 준 여행이었다. 올해 여름 대학원 연수와 여행을 붙여 무려 보름이나 미국에 머물게 되었고, 몇 년 만에 탄 장시간 비행으로 이틀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날려버려야 하는 일정이었지만 이 시간들이 아깝지 않을 소중한 순간들을 만났다.


그 순간 중 하나.

포틀랜드에서 불어든 가을바람과 향기가 불어든 시간을 기억한다. 푹푹 찌는 날씨 거나 폭우로 습기 가득한 한국의 여름과 달리 저녁 무렵 도착해 하룻밤을 보내고 브런치를 맛본 후 나온 포틀랜드의 시내에는 쨍하게 내리꽂는 햇빛도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가을이 왔음을 떠올리게 하는 가을 냄새가 묻어난 바람이 기분 좋게 불고 있었다. 곁에서 걷던 남편도 “이 바람 가을바람이다. 나 이 바람 좋아해.”라 말했다. 마침 나도 같은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


우린 파웰북스란 이름의 서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장서수가 상당할 것으로 보이는 규모가 큰 서점이었다. 포틀랜드 여행 기념이 될 만한 상품도 많이 팔고 있고, 하루키도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에서 “만약 당신이 책을 좋아한다면 미국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독립형 서점 ‘파월’에서 천국에 온 기분으로 한나절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안에서 길을 잃을 정도로 드넓은 서점에 고서와 신간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가 빽빽이 꽂혀 있다.” 라 표현했 듯 한 번쯤은 들러볼 가치가 있는 장소다. 이곳에서 나는 우선 베스트셀러 코너부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인 책들도 몇 권 보였고 황보름 작가의 <휴남동 서점>도 12위에 서 있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전 다녀온 스탠퍼드대학 내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익숙한 책이 별로 없고 이런 책이 스탠퍼드에서는 잘 팔린다고? 싶은 책들이 많았는데, 파웰북스의 베스트셀러 책장은 좀 더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곳 논픽션 섹션에서 나는 2년 전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은 <h마트에서 울다>란 에세이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어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 순간은 우리의 다음 여행 여정의 길잡이가 된다. (이 여행은 다른 글로 풀어볼까 한다.) 


한참 베스트셀러를 구경하다가 직원에게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은 어디에 꽂혀 있는지 물었다. 알파벳 순으로 정리된 문학작품 섹션에 있었는데 책장 맨 밑 두 칸을 배정받고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 살펴본다. 소설들은 대부분 있는 듯하고 최근 나온 음악이나 티셔츠에 관한 에세이도 꽂혀 있다. 그리고 <1Q84>엔 직원의 추천글도 쓰여 있는데 '퍼즐링이나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혹은 하루키팬이라면 꼭 읽어봐야 한다'고 적혀 있다. 난 사실 미스터리를 즐겨 읽지 않지만 하루키의 팬이기에 1Q84가 머스트란 점엔 동의했다. 이전에도 몇 권이고 영어공부도 할 겸이라며 영문판 하루키 소설을 산 적이 있지만 영어판은 커녕 일본어판도 번역본을 기다리지 못하겠다고 호기롭게 사놓고 결국엔 다 읽지 못한 채 출간된 번역본을 마주해 온 나이기에 또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기로 한다. 그렇지만 그냥 돌아갈 순 없다. 하루키 작품의 배경여행을 위한 포틀랜드 여행이지 않은가! 이런 나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는 듯한 표지 속 원숭이와 개구리의 시선이 매우 따갑게 느껴졌다. 하루키의 단편 소설 몇 편을 만화로 구성한 책의 표지 속 원숭이와 개구리다. 이 두 권을 기념으로 사기로 했다. 아마 만화라면 반신욕을 하면서라도 한 두 페이지 정도는 볼 테니. 게다가 스토리는 이미 아는 내용이고.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고스란히 '하루키 컬렉션' 책장에 꽂힌 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번 미국서부 여행 출발 2주 전까지도 어딜 여행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랜드캐년이나 포레스트검프 포인트 등 유타주 쪽은 이미 다녀왔고 LA도 다녀왔고. 그러자니 북쪽으로 올라가 봐야 하는데 저번 가족 여행에서 나만 도쿄에 다른 일정이 있어 가보지 못한 시애틀이나 가볼까. 그렇다면 한국 돌아가는 비행기는 어차피 다시 샌프란시스코에서 타야 하니 중간에 포틀랜드란 큰 도시가 있네. 여기에 들러야겠다란 식으로 인천에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탑승을 며칠 앞 둔 어느날 갑자기 결정을 했고, 이곳이 하루키의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란 여행에세이의 한 소재로 쓰였단 사실은 여행정보를 얻고자 읽은 <살아보고 싶다면, 포틀랜드>란 책 덕분이었다. 하루키의 여행에세이를 무척 좋아하는 나는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몇 번이고 읽었음에도 '가볼 일이 없겠지 싶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책에 담긴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란 제목의 에세이에서 하루키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두 곳의 식당과 근교에 있는 와이너리를 이야기한다. 우린 머물 곳도 같은 곳으로 할 겸 히스먼호텔(Heathman hotel)에 머물며 이곳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맛보기로 했다. (참고로 하루키는 저녁식사를 한다.) 


요리를 주문할 때만 해도 메뉴 자체가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메뉴라기 보단 어디서든 흔하게 먹을 수 있는 호텔 조식의 전형적인 메뉴들이었기에 하루키와 똑같이 저녁식사로 할 걸 그랬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주문을 하고 한참을 기다려(커피를 두 잔이나 리필해서 마셔야 했다!) 나온 요리를 한 입 맛보곤 그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정말 놀랍게도 맛있는 키슈였다. 그 흔하디 흔한 키슈란 요리를 이토록 맛있게 요리할 수가 있구나. 달걀맛이 무척 진하게 감도는데 전혀 비리지 않고 신선함이 느껴진다. 푸딩같기도 하고 달걀찜 같기도 한데 분명 채에 달걀물을 여러 번 거르는 등의 수고를 했을 것이 예상되는 질감이었다. 무척이나 부드러운 가운데 탄력도 잃지 않았다. 


키슈의 진한 달걀 맛을 맛보고 나니 포틀랜드를 배경으로 하는 B급 감성의 시트콤 <포틀랜디아>의 첫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두 주인공이 식당에 들어가 치킨 요리를 주문하려는데 무척이나 까다롭다. 자신들이 주문하려는 요리에 들어가는 닭이 어느 농장에서 자랐는지?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닭이 먹은 음식은 로컬(포틀랜드산)인지? 유기농인지? 닭의 이름은? (콜린이다.) 그 닭의 삶은 어땠냐? 등의 질문을 하다가 결국 두 주인공은 닭이 자란 농장에까지 찾아간다. 그 정도로 포틀랜드 사람들이 로컬 식재료에 집착을 한다는 점을 희화하는? 에피소드다. 히스먼호텔의 레스토랑 타븐(Tavern)에서 식사를 해보니 비로소 그 에피소드가 이해되기 시작했고, 심지어 시트콤에 나온 음식이 실제로 얼마나 맛있을지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함께 나온 샐러드 역시 예사롭지 않다. 올리브유 정도만 써서 드레싱도 가볍게 한 듯한데 간이 딱 맞고 싱그러운 풀향기가 그래도 입안으로 전해 들어왔다. 하루키 역시 포틀랜드의 요리는 기본적으로 조리 과정이 복잡하지 않고, 재료가 가진 자연의 힘을 조금 거드는 정도로만 요리를 한다고 표현했다. 무척 공감이 되는 표현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편이 시킨 연어 요리 역시 감탄의 연속이었다. 살이 탱탱하게 살아있도록 잘 구운 연어스테이크 위에 고기향이 나는 버섯, 어떻게 조리를 한 것인지 특유의 톡 쏘는 향을 잠재운 셀러리, 불향을 살려 구운 레몬, 어딘가 모르게 흙향이 남아있는 감자 등 잘 구워진 야채들이 올라가 있고 그 위에 노른자가 주르륵 흘러내리도록 완성시킨 수란이 올라가 있다. 재료 하나하나의 맛을 살리는 데 공을 들였지만 복잡할 것 없어보이는 요리법으로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절대 이 맛은 똑같이 구현할 순 없으리라. 곁들여 나온 소스 역시 블루치즈 향이 진하게 나고 꾸덕해서 이것만 퍼 먹어도 맛있었다. 하루키는 자신의 친구인 작가 폴 서루로부터 이곳을 추천받았다. 폴 서루의 책이 몇 권이나 집에 있음에도 좀처럼 완독 하지 못한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큰 상관은 없어 보이지만) 그의 혀에 무한한 신뢰가 생겨버렸다.


아... 히스먼 호텔에서 한 끼 정도는 정말 꼭 한 번 먹어봐야 한다. 포틀랜드엔 유명한 스텀프커피도 있고, 맥주 와인도 유명하고, 버거빌이란 버거도 유명하지만 일단 이곳만큼은 꼭 가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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