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배경여행, 도쿄 아오야마 바 라디오
퇴근길에 종종 칵테일 한 잔 마시고 돌아가곤 해요.
물론 나는 이런 타입의 사람이 아니다. 바 bar라는 곳을 태어나서 두 번 가봤나, 세 번 가봤나. 하는 정도. 칵테일도 그 정도 먹어보았을 거다. 맛있다는 건 잘 알지만 아직(앞으로 바뀔지도 의문) 내겐 너무 비싸다. 그 가격이면 편의점에서 수입맥주가 8캔, 와인 한 병도 충분히 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추천을 듣고 도착한 바 라디오 bar radio. 주변은 확실히 여유로움이 넘치는 동네였다. '여기는 목욕탕이야'라며 동네 구석구석을 소개하던 친구도 ‘사실 스파에 가깝지’라 정정한다. 바 라디오 바로 옆에 있는 미용실도 얼마나 비쌀지 상상조차 어렵다. 그래도 일단 바 라디오의 문을 열었다. 먼저 온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칵테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 설명을 좀 해주시면 좋아요.”
‘이미 마실 것을 정하고 왔다’는 나의 말에 조바심을 느낀 친구는 지긋한 연세의 바텐터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같은 날은 추우니 따뜻한 칵테일도 좋지요.” 로 시작되는 긴 설명과 간단한 질문들.
내가 주문하려는 칵테일은 블러디 메리. 하루키가 '맛있는 칵테일을 만드는 법'(<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에 수록)이란 에세이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가게 홍보는 아니지만, 아오야마 '바 라디오'의 블러디 메리는 역시 마셔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잔에 2000엔 가까이하는 블러디 메리는 생토마토를 직접 짜서 만든다고 한다. 매우 신선한 토마토를 사용하는 듯했다. 처음엔 채소의 향기가 나더니 그 끝에 매우 달콤한 향이 나기 시작했는데, 친구가 오랜 고민 끝에 주문한 칵테일에서 나는 향이었다. 초콜릿과 달걀이 들어간 칵테일로 따뜻하게 만들려면 꽤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손님이 많을 때 주문을 하면 조금 곤란하단다. 마침 손님이 우리밖에 없으니 괜찮다고.
블러디 메리는 아주 희미하게 매운맛이 돌았다. 타바스코 소스가 들어갔으니까. 보드카 양은 조절이 가능하다고 해서 70,80퍼센트 정도로 해달라고 했는데, 증류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겐 아주 적절한 양이었다. 추운 날씨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칵테일이지만 한국에 사는 나에게 이 정도 추위는 추위도 아니다. 딱 좋았다. 첫 모금을 입 안에 넣을 때 살짝 느껴진 얼음의 감촉이.
칵테일이 나오자마자 그때부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손님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 세 커플과 남자 직장인 그룹. 사실 처음 들어갔을 땐 우리밖에 없어서, 또 친구나 나나 이런데 자주 오는 사람이 아니라 어떠한 분위기인지 파악도 안 되고, 나는 ‘혹시 좀 더 좋은 옷을 입고 와야 했나’ 혼잣말을 했다. 하나둘 테이블이 채워지기 시작하자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음을 깨달았다. 점잔을 빼는 커플도 있었지만(잘 되어가는 분위기였다), 단골인 듯한 손님도 있고, 직장인 그룹은 굉장히 시끄럽게 떠들기도 했다.
아무도 없었을 때부터 손님이 차기 시작하기 전까지의 시간은 우리에게(특히 내게) 큰 행운이었다. 바텐더 오자키 코지 씨와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니까. 우리가 앞에 놓인 오자키 씨의 칵테일 사전에 관심을 갖자 그는 자부심에 찬 목소리로 “칵테일 제조는 물론이고, 그에 걸맞은 잔과 배치 등을 모두 직접 기획했다”고 말했다. "요즘 요리인들이 그릇 선정이나 플레이트 등에 코디네이터를 붙여 쉽게 책을 내곤 하는데 잘 못 된 일"이라 강경하게 말한다. 모든 걸 직접 해야 자신의 책이라고. 연륜, 업에 대한 자부심, 고집 등 많은 것들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책에 담긴 칵테일 사진 옆에는 사용한 잔의 원산지와 제작연도가 나와있었는데, 1880년에 만들어진 컵도 있곤 했다. 내가 “진짜일까”라고 친구에게 조용히 말하자 오자키 씨가 동일본 대지진 때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 도쿄도 크게 흔들려 칵테일 잔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렸다고. 컵들뿐만 아니라 앤티크 와인들도 많이 깨져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도쿄도 꽤 흔들렸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나로선 상상해보지 못한 피해가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이 있었겠구나 싶었다.
또 칵테일 잔 아래 깔린 컵받침 그림은 일러스트레이터 와다 마코토 씨가 그려준 것이라고 하는데, 오자키 씨가 원숭이띠라서 원숭이들이 서빙을 하는 모습이 되었다고 했다. 내가 “우리(용띠)는 만들려면 꼬리에 술병을 감아야겠네”라고 하자 친구는 “등에 올려도 되지” 했다. 바를 나오면서 “아까 오자키 씨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래. 우리처럼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냥 할아버지지만”라고 말하는 친구. 우린 서로를 보며 쿡쿡 웃었다.
일러스트레이터 와다 마코토, 와다 마코토? 와다 마코토.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데… 찾아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포트레이트 인 재즈>란 책을 만든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이렇게 연결되다니.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와 와다 마코토가 방금 우리 둘이 앉아 있던 그 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른단 말인가? 아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친구가 책을 한 권 선물해주었는데, <무라카미 송 村上ソングズ>이라는 책이었다. 심지어 와다 마코토가 그린 표지! 정말 센스 있다니까.
와다 마코토 씨가 그린 무라카미 하루키 책표지 : http://wadamakoto.jp/coverart/27.html
바 라디오에 가보시려면 : https://goo.gl/maps/Ak3VsanfrLR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