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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May 03. 2020

가까이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를 이야기

<신을 기다리고 있어>의 배경, 가부키초

작년 12월이 다가오던 어느 날. 연말이 가까워져서 인지, 출장 일정이 다소 급하게 잡힌 탓인지, 회사와 계약된 호텔이 아닌 사무실에서 한참 떨어진, 게다가 가부키초에 위치한 호텔에 머물게 된 적이 있다. 출장은 늘 저녁 비행기를 타고 가서 다음날 아침부터 근무를 하는 일정. 밤 11시를 넘긴 시간에 호텔까지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잔뜩 예민해 있었다. 아시아 최대 환락가 한복판을 그 밤에 걸어야 하다니. 회사는 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며.


그나마 다행히도 함께 출장을 간 동료의 가족분이 공항까지 픽업을 나와주셔서 가부키초 근처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차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한계가 있어 호텔을 몇십 미터 정도 남긴 지점에서 내렸다. 청바지와 코트 차림에 트렁크를 달달달달 끌었다. 되도록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하며 영화관 건물을 향해 걸었다. 호텔은 영화관 건물에 들어서 있는데, 건물 중간에 고질라 모형이 있어 고질라 호텔이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다. 밤의 가부키초를 즐기는 여행객들에게는 꽤 인기가 있어 보였지만, 나는 저 흉물스러운 고질라는 왜 있는 건가 생각했다. 술에 잔뜩 취한 국적 불문의 사람들이 꽥꽥, 꺅꺅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어린 여자애들은 화려한 화장과 복장을 하고 웃었다.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호텔 입구를 찾기 어려워 몇 차례 헤매자 겨드랑이에 땀이 차올랐다. 바깥 풍경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호텔 로비에 도착하자 나도 모르게 안도하는 한숨을 쉬었다. 로비에는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커다란 트리가 덩그러니 서 있었고, 한 아이가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자 엄마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이의 아빠는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하고 있었다.




이날 밤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오른 건, 5월 황금연휴에 만난 <신을 기다리고 있어>란 소설 때문이었다. 나와 닮은 차림으로 이 거리에서 트렁크를 끄는 주인공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일본인이라고 해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있다. 술집이나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듯한 화려한 차림의 남녀 외에도, 누가 봐도 조직 폭력배로 보이는 무서운 얼굴의 사람들도 이 거리를 걷고 있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스피커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경찰의 안내 방송이 서로 뒤섞인다. 호객행위는 금지라느니, 바가지 판매에 조심하라느니 하는 경찰의 안내를 듣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귀담아듣고 주의할 만한 사람은 애초에 이곳에 오지 않는다.   

나는 어깨보다 조금 긴 길이의 까만 머리를 하나로 묶고, 캐멀색 코트에 청바지를 입고 보아털 부츠를 신었다. 이곳 분위기와는 완전히 따로 노는 차림이다. 거리 중심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있지만 거기 가는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 하타노 도모미, <신을 기다리고 있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홈리스가 되어 거리로 나가게 된 스물여섯 살 여성의 6개월간의 삶을 이야기한다. 주인공 미즈코시 아이는 (상위권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도쿄에 있는 대학을 졸업 후 수십 군데의 회사에 지원했지만 딱 한 곳에 합격을 하게 된다. 합격한 회사의 최종면접에서 성희롱을 당해 가지 않기로 하고, 문구회사 파견직으로 근무를 시작한다. 파견직 계약이 끝날 무렵 구두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정직원 전환, 차선책으로 요구한 재계약이 성립되지 않아 실직을 한다. 집세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만화카페에서 숙식을 해결하기 시작하고, 일일 아르바이트, 즉석만남카페에서 돈을 번다. 대학까지 나와 이제까지 무얼 했냐고 멸시하는 공장의 작업반장, 남자에게 여러 차례 버림받고 아이 둘을 키우며 사는 사치(정신지체 증상이 있다), 아버지의 성폭행을 겪고 집을 나와 성매매를 하며 사는 여학생 나기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난 이 소설을 좀처럼 내려놓을 수가 없어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초반부에 묘사된 미즈코시의 삶이 나의 20대 초반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아 깊이 감정이입을 했다. 나 역시 SKY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와서 많은 회사에 지원했고, 떨어졌고, 딱 한 곳에 채용이 되었고, 다행히도 최종면접에서 성희롱을 당하진 않았다. 그러나 어렵게 입사한 첫 회사에는 아이의 직장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이 '회사 사정이 좋지 않고', '위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오가고' 등의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퇴사를 권고받은 선후배, 동기가 있었다. 주인공처럼 일처리만큼은 자신이 있으니 ‘나는 대상이 될 리 없지’하는 생각과 함께 고용 불안정은 늘 내 곁을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어나고 있을지 모를 이야기다. 그리고 내가 그날 밤 머문 호텔 벽 너머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을 이야기였다. 몇 번의 이직을 하고, 운이 좋게도 10년 가까이 회사원으로 살아남아 일을 하면서 회사 돈으로 일박에 2만 엔짜리 방에 머물며 투덜대던 나. (다음날 아침 조식도 맛이 없다며 나의 불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배경 속에서 <신의 기다리고 있어>의 아이는 2만 엔에 성을 팔아넘겼다. 여러 복잡한 생각이 뒤섞였고, 가부키초 풍경에 지난 회사생활 속 여러 단락이 겹쳐졌다.


언젠가 회사와 계약된 호텔이 만실이라 가부키초의 호텔로 가게 된다면 나는 지난 해 겨울 밤과 다른 눈으로 그 거리를 바라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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