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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지 Apr 28. 2022

투쟁보다는 포용, 전투보다는 춤

나의 문학관

나의 문학관 : 투쟁보다는 포용, 전투보다는 춤


1강에서 문학의 의의를 점검하며, 나는 나의 문학관을 돌아보게 되었다. 함께 글을 쓰는 친구들에게 “너희는 글을 왜 쓰고, 글은 무엇이라고 생각해?”라고 질문해보았다 그 중 세준이는 “창구”라는 답장을 주었다. 나는 글은 창구라는 세준이의 답변에 비교해 내 생각을 정리했다. 나의 글은 해소였다. 소통과 관계가 드러나는 “창구”라는 표현과 달리, 나는 무희가 춤을 추듯 에너지를 발산하고 풀어내는 해소였다. 수업에서는 문학이란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지향과 가능성을 나타냄으로써 인류에게 가치를 갖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독한 백조의 노래”, “예외적 개인”이라는 표현을 곁들여 문학의 순수성과 예리함, 독자성을 강조했다. 문학에 대한 소견을 밝힌 시대의 지성인들이 입을 모아 문학의 요소로 말했던 것은 사회 현실과의 투쟁이었다. 특히 루카치는 “문학이란 모순된 사회를 즐겁게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와 격렬하게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루카치의 단언적인 주장에 마음이 찔리고 말았다. 나에게 글쓰기란 춤이고 해소였기 때문이다.그러면 나는 모순된 사회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써 왔던 글과 나의 문학적 여정은 잘못된 것일까. 약간의 혼돈에 빠졌었다. 


며칠이 지나서야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나는 내가 자주 학문적 권위에 굴복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학자들의 의견이나 강단에서 전달되는 지식은 가치가 있지만, 그것은 나의 생각을 풍부하고 견고하게 할 때의 이야기다. 선험적 지식들이 현재 나의 생각 과정을 단편적으로 만들어버린다면, 그건 권위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고, 진정한 의미의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의에서는 모순과 비판 없이 흥미만을 추구하는 작품은 나쁘다고 표현했지만, 흥미를 추구하고 글쓰기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좋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중요한 초석이 된다. 강의에서 표현된 문학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미간을 심각하게 지푸리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강연에서 김영하 작가가 나와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하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성직자, 정치인, 공무원, 요리사 그리고 소설가 중에 가장 일찍 죽는 직업인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지며 정답은 자신의 직업이기도 한 소설가, 작가라고 말했다. 그 때는 그 이유가 잘 와닿지 않았는데 끊임없이 사회와 투쟁하고 골몰하는 소설가의 모습을 생각하면 조금은 납득이 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문학은 조금 다르다. 어쩌면 위의 지식인들이 말한 문학의 모습 중에 “자연과 하나 됨을 지향하며, 파괴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으로의 지향을 나타내는” 점과 닮아있을 수도 있다. 나에게 글은 노래이자 춤이다. 살아가기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도 아주 작은 행복을 노래하고 싶다. 자본주의, 능력주의, 온갖 -주의가 생성한 뼈대로 둘러싸여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나는 아주 작아져서 체계의 빈틈에서 자유와 초월을 발견하고 싶다. 감정과 낭만에 충실하여 세계가 강요하는 생각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춤을 추고 싶고, 글로 낭만을 충동질하고 싶다.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게 강의에서 말하는 문학의 투쟁적 의미에 가까워져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투쟁하고 싶지 않다. 투쟁은 거리를 두게 하고 투쟁은 적과 아군을 만들어 적의를 품게 한다. 나는 세계를 포용하고 싶다. 내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고, 내가 태어난 이 세계 안에서 가능성을 찾고 싶다. 나의 세계를 사랑하고 싶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다. 투쟁은 각자의 위치를 만든다. 하지만 포용은 경계를 녹이고 다 함께 춤을 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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