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의 시 <납 작 납 작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는 시인이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를 보고 화가가 그림 그리는 과정을 추측해 자신의 감상과 섞어 시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김혜순은 <빨래터>에 나온 여인들이 쭈그려 앉아 빨래하는 장면을 보며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라는 의문과 일종의 항의를 느낀 것 같다. 제목에 등장하는 “납 작 납 작"은 박수근의 납작하고 단단하고, 약간의 건조함이 느껴지는 화풍을 언어로 이미지화한 듯하다.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며 화가가 그림을 그린 과정을 느끼는 일은 섬세한 감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주 묘한 지점은 박수근의 그림이 김혜순을 그렇게까지 느끼도록 끌어들이고, 김혜순은 박수근이 말로서는 표현하지 않았을 “반항"을 시 속에 녹여낸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라는 시 속 반항은 다름 아닌 그림을 통해 전달되고 공유된 아낙네들의 빨래하는 모습, 당시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대한 의문과 반항으로 읽힌다. 다만 그런 반항을 “하나님"에게 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네 사람들이 누리게 된 삶의 모습을 이루게 한 공동의 운명에 대한 반항인 것 같다.
납작함도 이 시에서 다룰만한 주제이다. 미술에서 화가의 스타일은 문학에서 시인의 주제 의식에 비견되는 것이다. 스타일은 단지 미의 형식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작가의 주관적 세계와 작가의 현상학적 장에서 소화된 외부 세계의 이미지가 작가 고유한 손놀림을 통해 화판에서 혼합되고 투영된 것이 스타일이다. “드문드문 세상을 끊"고, “한 며칠 누"르다가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로 탄생한 박수근의 스타일은 시인 김혜순이 느끼고 이해한 바와 같이 “납 작 납 작”하다. 그렇게 납작한 화법으로 그린 흰 하늘, 쭈그린 아낙네 둘. 바짝 마르면서 세월도 냄새도, 노고도 함께 함축된 것 같다.
예술을 통해 시대를 사랑하고 운명에 대한 발칙한 항거를 할 수 있다면 하늘과 아낙네들을 그린 자신의 그림을 보며 “서성서성"하고, “입술도 없이”,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미소 짓는 박수근의 묘한 표정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낙네들과 지극한 일상, 그리고 바짝 마른 납작한 그림의 겹에 숨겨진 우리들에 대한 사랑과 운명을 지그시 노려보는 반항기. 시인 김혜순이 찾아낸 그림의 정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