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2
책 이야기는 어디 가서 쉽게 나눌 수 있는 적당한 소재가 아니다. 책 이외의 읽을거리가 넘치는 데다가, 더 이상 읽지 않고 ‘보기’만 하는 세상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톨스토이를 읽었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말하기에 더더욱 용기가 나지 않는 이야기다. 예전에 책 좀 읽는다는 사람에게 톨스토이 이야기를 했다가 ‘그런 고루하고 교훈적이기만 한 작가를 읽느냐'는 말을 듣고 난 뒤에는 더더욱 그렇다. 독백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에이모 토울스는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러시아가 서구에 기여한 세 가지로 안톤 체호프과 톨스토이, 차이콥스키, 캐비아를 꼽았다. 톨스토이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대 작가 이기 때문일까. 작품의 스케일이 남다르다. 먼저 분량에서 압도적이다. 단행본으로 판매하는 출판사에선 천 페이지 가까운 분량이고, 출판사마다 2권 혹은 3권까지 나눠져 있다. 톨스토이는 그의 조국 러시아만큼 방대한 스케일의 작품을 남겼다.
여러 곳의 추천도서 목록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보았다. 언젠가는 읽어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마침 한 출판사에서 놀랍도록 저렴한 가격에 ebook을 대여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행복한 가정의 사정은 다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소설가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이 첫 문장이라고 들었다. 톨스토이는 아마 ‘첫 문장 천재’가 아닐까. 사람에게 첫인상이 중요하 듯, 책에서 첫 문장은 그 책의 첫인상이 된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인상, 첫 문장은 강렬했다. 첫 문장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나는 안나가 사랑에 빠지고 몰락하고 파국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줄곧 달렸지만, 작가는 그 사이사이 하고 싶은 다른 이야기가 많았다. 조급한 나는 시험에 들고 말았다. 줄거리의 진행은 더디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작가는 인물의 감정, 표정 묘사에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문장이 주는 묵직한 맛이 있었다. 그럼에도 전개 느린 드라마처럼 답답했다.
요즘 책들은 300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나는 이런 트렌드에 친숙하다. 그러나, 톨스토이 1828년 출생, 1910년 사망. 옛날 사람이다. 작가는 내게 너무나 느린 리듬을 권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들만 생각하고 너무 쉽게 생각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그의 단편들은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이야기들 투성이었는데, 깜빡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의 작가다. 이 위대한 작가는 단순히 한 여자의 이야기만을 담지 않았다. 그 여자가 살아가던 시대의 농민과 지주의 이야기, 당시 귀족사회의 이야기, 사랑과 결혼, 종교에 대한 이야기까지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 전체를 이 한 편의 소설 안에 전부 담아냈다. 작품에 이 모든 것을 담아낸 열정과 역량 모두 대단했지만, 독자로서 너무 빨리 지쳐버렸다. 결국 나는 ‘독서 중단’을 선언했다.
그 후 나는 다른 책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허삼관 매혈기>를 쓴 소설가 위화의 에세이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에서 다시 <안나 카레니나>를 만났다. 위화 역시 중국이 대표하는 소설가다. 이런 소설가에게도 <안나 카레니나>는 대작이었다. 위화는 톨스토이의 이 작품에 무한한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은 지나갔다. 다시 <안나 카레니나>를 집었다. 2년 만이었다. 그렇게 작년 12월을 시작으로 올해 1월까지, 약 2천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드디어 완독 했다. 톨스토이는 5년간 쓴 책을, 나는 3년 만에 읽었다.
소설의 줄거리
주인공 안나는 친척 아주머니 손에 자라다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고위공직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결혼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그저 그녀의 미모에 걸맞은 결혼상대와의 결합이었다. 아이를 낳고 결혼생활을 이어가지만, 출세와 성공만을 쫓는 남편 알렉세이와의 결혼생활은 안나를 숨 막히게 한다. 이를 견디지 못하던 안나는 사교계에서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급기야 안나는 브론스키의 아이를 임신한 체 집을 떠나 브론스키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안나는 자신의 감정에 반응한 열정적인 삶을 선택한다. 당시 사회에서 안나의 이런 선택은 금기를 깬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귀족사회는 이런 안나를 용납하지 않았고, 안나는 수치와 모욕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 속에서 안나는 새로운 인생을 꿈꾸지만 자신이 원했던 행복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불안을 느낀다. 이혼만이 자신을 구원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체면과 원칙만을 고수하는 남편 알렉세이는 끝내 이혼을 거부한다. 브론스키와의 관계에서 조차 갈등이 계속되자, 안나는 브론스키를 후회하게 만들기로 결심한다. 브론스키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신을 파멸시킬 계획을 세운 안나는 지나가는 기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이 책은 톨스토이가 작가로서 정점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작품 속에서 안나가 남편 알렉세이와 불화를 겪은 것처럼, 톨스토이 역시 아내 소피아와 신념의 차이로 불화를 겪으며 갈등했다고 한다. 톨스토이 역시 알렉세이처럼 가정이 평화롭지 못했지만, 끝까지 이혼은 하지 않았고 그 갈등은 노년까지 이어진다. 결국 톨스토이는 가정불화로 가출을 하게 되고 여기서 얻은 폐렴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토록 엄청난 분량의 작품을 집필해낸 작가의 집중력과 역량이 놀랍다. 이토록 긴 분량의 소설 속에서 작가가 매 순간 각각의 인물로 충실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안나로 알렉세이로, 브론스키로, 레빈으로, 키티로, 톨스토이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오직 자신의 영혼에 전부 담은 체, 5년간 이들과 함께 살아갔다. 이런 작가가 살았던, 러시아라는 나라가 새삼 궁금해진다.
쉽게 집어 들기에는 그 분량면에서 만만치 않다. 어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술술 읽히지도 않는다. 중간중간 ‘독서 중단’의 유혹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 다 읽고 난 후에 깊은 감동이나 강한 인상을 받는 독서가 있다면, 독서 그 자체가 하나의 경험이 되는 경우가 있다. <안나 카레니나>는 하나의 경험이 되는 독서에 가깝다. 그래도 혹시 이 대 작가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안나 카레니나>를 권한다. 총 4권으로 구성된 <전쟁과 평화>보다는 짧다는 사실을 되새기면 독서의 큰 동력이 될 것이다. 첫 문장에 낚였다고 비탄해하기보다는 약간의 인내심을 갖고 읽어 나간다면, 독자는 완독이라는 엄청난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