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으니 욕이 나온다

by 쓰는 사람

오전에 산양유배달을 마친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모모의 정원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소호마을 청년들과 논둑을 치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모내기 할 수 있는 논을 만들려면 물을 담을 수 있도록 논 가장자리의 둑을 높여야 한다. 논에서는 발이 푹푹 무릎까지 빠져서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흙탕물이 튀어서 옷이 금새 지저분해졌다. 우리는 삽으로 볼록 솟은 곳의 흙을 퍼서 논둑에 쌓아올렸다. 물을 머금은 진흙은 무거웠고 삽에서 질질 흘러내렸다.

논둑작업을 마친 청년들이 상병씨 집 거실에 모여 담소를 나눌 때 나는 햇볕비치는 마당에 나와 굳은 표정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배달 마치고 그냥 집에 갈 걸 괜히 돌아왔다. 두시간 있다 다시 와서 가축먹이를 주고 산양유를 짜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스러웠다. 내 생계문제도 해결 못한 상황에서 이런저런 일에 끌려 다니는 것 같았다. 삶이 뜻대로 이끌어지지 않아 조바심이 났다.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니가 원한 삶이 이거였어?’ 질책같은 질문이 머릿속에서 쉼없이 맴돌았다.

엄동이에게만 젖을 짜다 꽃순이가 출산을 한 후 산양 두 마리의 젖을 짜게 됐다. 꽃순이는 초산인데다 성질머리가 더러워서 엄동이보다 젖짜는 품이 두배는 더 들었다. 가축 돌보는 데에는 여러모로 모모정원 친구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내가 쉬는 날에는 다른 사람들이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먹이를 주었다. 산양은 하루라도 젖을 안짜면 생산량이 확 줄어버려서 내가 쉬는 날에는 상병씨가 대신 젖을 짜야했다. 마을 분들의 주문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서 대안학교 교사인 용진씨가 학부모들에게 산양유를 홍보해주었다. 용진씨는 매번 뜨끈한 우유병을 책가방에 넣고 학교에 가서 나 대신 학부모들에게 전해주었다. 가축은 함께 돌보는데 산양유와 계란을 판매한 수익은 내가 전부 가져간다는 게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마을로 올 때는 하루에 세시간 정도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책읽고 글쓰는 삶을 상상했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산양유 생산과 배달 외에도 챙겨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회원별로 배달갯수와 수금여부를 확인하고, 마을 커뮤니티에 산양유 홍보글을 쓰고, 틈틈이 천원가게에 들러 우유병, 보냉바구니, 거름망등의 물품을 사야했다. 농사일이나 농장작업을 할 때도 잦았다. 매일 여러 일에 쫓겨다니다보니 정작 글쓰기는 자꾸 뒤로 밀려났고, 의욕만 앞서 이것저것 들쑤시다 성과없이 흘려보내는 나날이 이어졌다.

수익을 혼자 차지한다는 심적부담을 느끼며 시간과 에너지의 상당부분을 들여 얻은 돈은 생계를 이어가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배달을 시작한 첫달에는 주문이 꽤 들어와서 50만원 정도를 벌 수 있었다. 전셋집에 살아 월세부담이 없고 술담배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 정도 돈이면 한 달을 살아가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두 번째 달부터 주문을 끊는 가정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우유에 익숙한 사람들중에는 산양유 특유의 향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고, 우유보다 비싼 가격에 부담을 느낀 분들도 있었던 것 같다. 매출에서 사료값과 물품비용을 제하고 나니 둘째달 수입은 20만원이었고, 셋째달 수입은 30만원이었다. 넷째달에는 팔지 못한 산양유 병이 냉장고 가득 쌓여서 매일같이 산양유를 꾸역꾸역 마셔야만 했다.


버는 돈이 적다보니 가지고 있던 돈이 차츰 줄었다. 통장 잔고가 10만원대로 떨어지면서부터는 항상 가슴이 답답했다. 그것은 ‘삼포 세대의 절망’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닌, 찬거리를 못살지도 모른다는 피부에 와닿는 불안이었다. 심장 위에 20킬로 짜리 돌덩이 하나가 얹어져 있었다. 밥을 먹든 일을 하든 거리를 걷든 언제나 심장위의 묵직한 돌덩이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과 왁자지껄 어울릴때조차 마음 구석에는 불안이 웅크리고 있었다. 어쩌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정신을 차려보면 늘 미간을 찡그린 채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검소하고 성실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나는 살면서 진정한 가난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라면 끓이고 세수하고 빨래하고 컴퓨터하는 일상에는 일정한 경제력이 전제되어 있다. 돈이 없으면 수돗물도 전기도 가스도 와이파이도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된다.

생태적 삶에 뚜렷한 지향을 가진 활동가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물질적 욕망을 부추기고 사람을 소진시키는 도시의 삶에 염증을 느꼈고 그 대안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기로 했다. 그는 농사가 식량생산 이상의 것, 삶을 풍요롭게 가꾸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흙만지고 작물 가꾸는 일을 좋아했던 그는 농사를 짓는 한편 지속가능한 농업에 대해서도 공부를 이어갔다. ‘농사로 가꿔가는 조화로운 삶’을 주제로 교육과정을 개설했고 농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연결시켜 소모임을 만들었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유기농 작물을 재배하며 그것으로 참여자들의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수익구조까지 만들어냈다.

종종 그 활동가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사람처럼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확신이 있었고 자신이 하는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에겐 획기적인 발상과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실력과 끈기가 있었다. 내겐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삶에 그 사람만큼의 실력과 애정이 없었다. 흙만지며 텃밭을 돌보다보면 소박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지만 인생을 걸 만큼의 강렬한 끌림은 아니었다. 가축을 돌보고 농사를 짓는 건 생계를 유지하며 글쓰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이 일이 내게 맞나?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걸까? 젖짜고 소독해서 배달하는 일은 동일한 작업의 반복이다. 이 일을 계속한다고 전문성이 쌓일까? 몇 년 후에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수입이 더 나은 일을 알아볼까? 아니다. 이 일 시작한 지 넉달밖에 안됐다. 어떤 일이든 나름의 고충이 있게 마련이다.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도망가면 결국 어떤 곳에서도 일할 수 없게 될 거다. 나는 주어진 업무만 수행하는 회사원이 아니라 내 일을 만들어가야 하는 사람이다. 일단 버티면서 다른 판로를 확보해야하는 게 아닐까? 산양유로 비누나 세안제같은 이차상품을 만들면 보관과 판매가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항생제와 살충제 없이 가축을 기르고, 그렇게 얻은 달걀과 산양유를 지역사람들에게 공급하는 건 분명 의미있는 일 아닌가? 세상에 해 안끼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직업이 어디 흔한가? 이 농장의 여러 조건들을 잘 활용하면 분명히 먹고 살 방안이 있을 거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

그렇다해도 한달에 이삼십만원으론 도저히 살 수가 없다. 내가 속물이라 그런건가? 내가 검소하지 않아서 그런건가? <세상에 이런 일이>의 씨돌님은 산골에서 농사지으면서 한 달에 3만원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가던데, 내 태도가 글러먹은건가? 그렇지만 나는 애초부터 그런 순수한 지향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아닌데, 퇴직연금을 받을 수 있는 철밥통 직장이 평생의 목표였는데, 재테크 서적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으며 열광했던 사람인데, 도시에 살던 어중이떠중이인 내가 어떻게 갑자기 그처럼 맑은 정신과 강한 생활력을 가질 수 있겠어? 나도 뉴발란스 신발을 신고 싶고, 낡아빠진 청바지 대신 새 청바지를 입고 싶다. 나도 친구들 만나서 밥값 계산할 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오늘은 내가 산다’고 말해보고 싶다.

일하는 내내 머릿속에 불평과 불만이 울려퍼진다. 하루에 대여섯시간은 일해, 이 시간에 다른 일 했으면 지금보다 곱절은 더 벌어. 내가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하는거지? 젠장! 이 돈 가지고 어떻게 살란 말이야! 명치 아래에 이글이글 불이 타오른다. 울분이 확확 치솥는다. 눈에 독기를 품고 세상을 쏘아본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나갈때마다 도로를 달리며 소리를 질렀다. 젠장, 빌어먹을! 으아아아아아~!!! 헬맷을 쓴 채로 목이 쉬어 쇳소리가 날 때까지 악을 썼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지만, 누구도 이 일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소리라도 안지르면 도무지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길이 없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매달 관리비 미납세대 목록을 작성해 1층 아파트 게시판에 부착했다.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이 아파트에는 40만원, 90만원, 심지어 450만원을 미납한 세대도 있었다. 다음달에는 내가 사는 동호수가 미납세대 목록에 포함되면 어쩌지? 가스비와 관리비가 나를 쫓아온다. 당장 이번달의 생활비를 걱정해야하는 사람이 창조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돈걱정에 짓눌려있다보니 늘 안절부절 못했다. 불안에 사로잡혀 상황을 이성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공모전 사이트와 알바천국 사이트를 검색하며 푼돈 벌어볼 궁리만 했다.

언젠가 상병씨 집에 있다 밖으로 나왔는데 길가에 세워놓았던 오토바이가 넘어져 있었다. 넘어진 부분이 흉하게 찌그러졌고, 아스팔트바닥에는 엔진오일이 잔뜩 흘러 있었다. 지나가던 차가 오토바이를 들이받아 넘어뜨린 후에 목격자가 없으니 도망간 것 같았다. 나는 성질이 나서 담벼락을 차고 발을 구르며 분통을 터뜨렸다. 개자식! 오토바이를 넘어뜨렸으면 주인한테 연락하거나 최소한 세워놓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남의 오토바이 엎어놓고 그대로 내빼? 나쁜새끼! 빌어먹을 놈!

넘어진 오토바이를 보고 방방 뛰었던 건 수리비가 많이 나올까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빠듯해 죽겠는데, 돈들어올 데도 없는데, 이렇게 어이없는 일에 쓸 돈 한푼도 없단 말이다! 한 달에 30만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겐 아무일도 일어나선 안된다. 이빨이 아파도 안되고, 맹장이 터져도 안된다. 속도위반으로 딱지를 끊어도 안되고, 파운드케잌이 먹고싶어도 안되고, 친구가 결혼해도 안되고, 부모님 생신이 다가와도 안된다. 30만원 인생에게 인간관계란 사치일 뿐이다. 30만원 인생에게 미래는 없다. 간신히 버텨가는 끝없는 오늘이 있을 뿐이다. 다시 세운 오토바이는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발시동을 걸어 오토바이 가게를 가니 다행히 쏟아진 엔진오일만 보충하면 된다고 했다. 엔진오일값을 결제하고 나니 통장에 66850원이 남았다.

요즘처럼 최저가 검색이 가능한 시대에는 몇만원만 있어도 밥 굶을 일은 없다. 인터넷에서 맵쌀 10킬로그램을 최저가로 구매하면 32000원 정도다. 쌀 10킬로그램이면 한달은 족히 먹는다. 이차세계대전때 일본군은 구더기 슨 쌀과 구정물만으로 몇주를 버텼다고 한다. 사람 굶어죽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내겐 밭에서 캐놓은 감자 한박스에 케찹까지 있다. 잠시 궁색하게 보내는 것쯤 내게 별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진짜 두려웠던 건 주변 사람들에게 제 몸뚱아리 하나 책임 못지는 무능한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었다. 난 돈이 별로 없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번듯하게 보이고 싶었다. 서른 다섯 살이나 먹고 제 앞가림 하나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면 스스로가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았다. 그 두려움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부모나 친구에게 손벌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속으로 전전긍긍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려 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내 밥벌이는 한다는 실낱같은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두어 달을 돈문제로 가슴졸이면서 빈곤은 인간정신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걸 체험했다. 두 달이 아니라 2년을 이런 심리적 압박속에서 보낸다면 심혈관계 질환 발병율이 8배는 증가할 것 같았다. 단순소박한 삶이니 가난한 마음이니 하는 말도 최소한의 경제적능력이 뒷받침될때나 쓸 수 있는 것이다. 지나친 가난은 사람 마음을 휴지조각처럼 구겨버린다. 다시는 이런 곤란한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내 생계쯤은 가뿐히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야겠다고, 어떤 노력을 해서라도 그 정도의 경제적 역량을 키우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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