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갈수록 더 빠른 거야

by 쓰는 사람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모모>


나는 늘 허겁지겁 바쁘다. 나는 혼자 있을 때 항상 분주하게 뭔가를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압봉으로 등과 허리의 뭉친 근육을 풀어준다. 누워서 지압만 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누워서 보는 독서대’로 책을 읽는다. 이후에는 10분 정도 좋아하는 책을 베껴쓴다. 훌륭한 작품을 베껴쓰면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문장 감각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이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인문학 팟캐스트를 반복해 듣는다. 밥먹는 시간에도 부지런히 지식을 쌓을 수 있다. 그냥 밥만 먹기에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늘 다급하게 아파트 주차장으로 뛰어간다. 대게 출근시간에 딱 맞춰 직장에 도착하고 종종 지각하기도 한다. 헉헉대며 차문을 열고 좌석에 앉으며 내일은 오분 일찍 나오리라 다짐하지만 다음날도 나는 주차해둔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다. 백일동안 내 출근길을 촬영해 영상을 만든다면 입고 있는 옷만 달라질 뿐 헐레벌떡 달려가는 장면은 매일 같을 것이다.

대중교통을 탈 일이 있으면 읽을 책을 챙겨간다. 버스가 덜컹댈 때마다 읽고 있던 부분을 놓치고, 팔도 아프고, 집중도 잘 안되지만 미련스럽게 어떻게든 읽어보려 애쓴다. 멍하게 있거나 스마트폰으로 애니팡을 하기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퇴근해서는 저녁을 차려먹고 설거지를 한다. 수세미에 퐁퐁을 묻혀 밥그릇을 문지르며 ‘이거 빨리하고 씻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양치질을 하면서 ‘이거 빨리하고 글써야지’라고 생각한다. 자기 전까지 글쓰고 책읽고 하루일과도 반성하려면 시간이 없다. 정신없이 이것저것 하다보면 어느새 밤 11시가 훌쩍 넘어있다. 알람은 늘 7시간 15분 후로 맞춰놓는다. 7시간 이하로 자면 하루종일 피곤하고 7시간 30분 이상 자기엔 시간이 아깝다. 7시간 15분은 몸상태를 유지해주는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은 수면시간이다. 주말에도 마찬가지로 7시간 15분만 자려 한다. 휴일의 시간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싶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직장을 다니고 글을 쓰는 게 이전보다 버겁게 느껴졌다. 맨밥에 간장만 먹고 사는 사람처럼 힘이 없었고 잠시만 활동해도 금방 지쳐 버렸다. 눈 앞의 일을 해야한다는 의지는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몰아붙여 뭔가를 할때면 일의 효율이 극도로 떨어졌다. 노끈으로 꽉 동여맨 듯 명치가 갑갑했다. 심장 아래쪽에 불이 붙어서 바싹바싹 타오르는 것 같았다. 온통 시뻘겋게 녹슬어버린 기계를 억지로 돌리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기력이 없을까?

구소련에 류비셰프라는 곤충학자가 있었다. 류비셰프는 일생동안 70권의 학술서적을 출간했고 12,500장에 달하는 연구논문을 남겼으며 수십만마리의 곤충을 채집해 표본을 만들었다. 수학과 물리학, 역사등 전공 이외의 분야에도 박식했다. 자신을 가혹하게 채찍질하며 이룬 성과가 아니었다. 그는 하루 8시간 이상씩 잠을 잤고 매일 산책을 즐겼다. 한 해 평균 60여차례의 공연을 관람했고 친구들에게 편지도 자주 썼다. 그가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비결은 시간통계였다. 그는 26살때부터 56년간 매일 시간을 어떻게 썼는지 기록했고 이를 일간, 주간, 월간, 년간 단위로 통계를 냈다. 그는 시간통계에 사용하는 시간까지 통계를 낼 만큼 철저했다. 류비셰프는 시간기록을 통해 평생의 시간을 총체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고, 한 인간이 해냈다고 보기에 믿을 수 없을만큼 놀라운 성취를 이뤘다. 사람들은 그를 ‘시간을 정복한 남자’라고 불렀다.

이십대 후반에 류비셰프의 전기를 읽었을 때 그가 시간통계로 이룬 업적들에 감탄했다. 내게 시간은 아무리 움켜쥐려해도 손아귀사이로 줄줄 새어나가는 모래알 같은 것이었다. 시간통계라는 수납함에 시간을 차곡차곡 넣어뒀다가 이루고픈 목표에 집중적으로 쏟아부을 수 있다면 나도 그처럼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류비셰프 이야기에 ‘어휴~ 시간정복 안하고 맘편히 살고 말지, 지나치게 강박적인 거 아냐?’하며 반감을 보일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류비셰프에게 끌렸던 건 나 또한 시간을 일종의 자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남고싶지 않았다. 인생이 한번 뿐이라면 사는동안 남부럽지 않은 성취를 이루고 싶었고 그런 성취를 이루는 건 결국 노력을 동반한 시간이라고 믿었다. 류비셰프는 내가 막연히 꿈꾸던 것을 시간통계라는 방식을 통해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한 사람이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10개월은 나라는 사람을 힘껏 비틀어 마지막 남은 한방울의 시간까지 쥐어짜내려던 시기였다. 하루종일 책상앞에서 수험서만 보는 나날이 반복됐다. 화장실 문에 사자성어와 표준어 목록을 붙여두고 양치할 때마다 들여다보았다. 샤워할 때는 행정법 녹음파일을 들었다. 일주일에 하루를 쉬었는데 그마저도 다 쉬자니 불안해서 정오까지는 책을 붙잡고 있었다. 류비셰프를 따라 공부시간, 쉬는 시간, 낭비한 시간을 수첩에 기록하고 주간, 월간 단위로 통계를 냈다. 그 시절의 나는 항상 불안했다. 고요한 집에서 홀로 책만 들여다봤지만 경찰의 추적을 피해 여인숙에 숨어있는 탈주범같은 심정이었다. 온 힘을 다해서 뜀박질을 하지 않으면 평생동안 내 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무기력을 견디며 근근이 일상을 이어가고 있을 때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를 읽었다. 시내에서 작은 이발소를 운영하던 푸지씨에게 회색양복을 입은 사내가 찾아온다. 자신을 시간저축은행의 영업사원인 XYQ 384 b라고 소개한 그는 푸지씨가 일생동안 사용한 시간을 초단위로 계산해 보여주며 그가 막대한 시간을 낭비해왔음을 지적한다. 그런 다음 지금부터라도 시간을 아껴 저축해두면 먼 훗날에 이자까지 붙여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꼬드긴다. 회색신사의 꾐에 넘어간 푸지씨는 그 순간부터 시간을 철저하게 절약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그는 손님들과 잡담을 즐겼고 콧노래를 부르며 이발을 하던 사람이었다. 회색신사가 다녀간 뒤부터 그는 더 이상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최단시간에 이발을 끝내서 손님을 한 명이라도 더 받는 것만이 중요해졌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집에 모시던 어머니를 요양시설에 맡겼고 돌보던 앵무새도 팔아치웠다. 매일 다리아 양을 찾아가 꽃을 선물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는 예전보다 돈을 많이 벌게 되었지만 더 이상 자신의 일에서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수 없었다. 대도시에는 푸지씨와 같은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갔다. 그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더 바빠졌으며 더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푸지씨의 모습은 어쩐지 내 모습과 닮아있었다. 학창시절부터 늘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공무원 시험준비를 그만두고 글쓰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저그런 작가가 아니라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었다.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가능한 많은 시간을 읽고 쓰는 일에 쏟아부어야 할 것 같았다. 빨래나 운동, 여가활동은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해치워야 했다. 나는 할 게 많았고 그러자면 시간이 없었다. 눈앞의 일을 재빨리 해치우고 다음 일을 해야했다. 다음 일 또한 그 다음 일을 위해 재빨리 해치워야만 했다. 늘 시간을 아꼈음에도 항상 시간에 쫓겼다. 그토록 바쁘게 살았는데 내가 아낀 시간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회색신사들은 사람들이 아낀 시간을 훔쳐 기생충처럼 목숨을 이어가는 존재들이다. 모모는 회색신사들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아이다. 모모를 위험한 적으로 규정한 회색신사들이 그녀를 해치려 하자, 모모는 거북 카시오페이아의 도움을 받아 그들로부터 달아난다. 다급해진 모모가 더 빨리 걷자고 재촉하자 거북이 말한다.

“느리게 갈수록 더 빠른 거야.”

‘하얀색 구역’에서는 차에 탄 회색신사들이 아무리 엑셀러레이터를 밟아도 거북의 뒤를 따라 느릿느릿 걷는 모모를 따라잡지 못한다. 느리게 갈수록 더욱 빨리 갈 수 있고, 서두를수록 더욱 더뎌질 뿐이라는 것은 ‘하얀색 구역’의 비밀이었다.

거북이의 한마디가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는 빠른 것을 권장하고 느린 것을 경멸하는 문화에서 살았다. 올림픽 육상경기중 100m 달리기가 제일 주목받는 건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람들을 가리기 때문이 아닌가? 20대 초반에 의사나 판사가 된 사람을 우리는 대단하게 여기지 않나? 영어독해실력이란 곧 영어지문을 빠르게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닌가? 빠름은 우수함과 같은 말이며 누구나 지향해야 할 가치 아닌가?

느리게 걷는 소녀와 거북을 자동차를 모는 회색신사들이 따라잡지 못하는 건 언뜻 환상속에서나 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느리게 갈수록 더 빠르다는 역설이 오히려 현실과 들어맞았다. 문제를 해결하고싶다면 먼저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문제에 대해 이해한 딱 그 수준만큼만 그 문제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문제를 곱씹어 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일수록 더욱 그렇다. 문제와 대치하고 있을 때 나는 항상 조급했다. 문제를 떠안고 있는 게 고통스러워 이것을 빨리 해치워버리고픈 마음이 컷기 때문이다. 나는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빈약하고 피상적인 해결책만 움켜쥔 채 문제 속으로 뛰어들었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상황을 진전시킬 수 없었다. 애초부터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면 열심히 엑셀러레이터를 밟을수록 목적지에서 더욱 멀어질 뿐이다. 나는 늪에서 허우적대다 더 깊이 빠져드는 사람처럼 문제에서 헤어나올수 없었다. 서두를수록 마음은 조급해졌고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돌이켜보면 내게 시간은 주유소에서 판매하는 경유같은 것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최대한 많은 양을 확보해야 하는 것, 한방울도 흘려선 안되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나는 최근 몇 년간 쉬어야 했기 때문에 쉬었지, 쉬고 싶어서 쉰 적이 없었다. 쉬지 않으면 일할 수 없기 때문에 쉬었던 것이지, 휴식 자체가 즐거워서 쉰 것이 아니었다. 나처럼 체계적으로 자신을 착취하는 인간이 또 있을까? 어쩌면 나는 자본주의 체제의 부품이 되기에 가장 바람직한 인간형이 아닐까? 류비셰프 할아버지조차 나를 본다면 ‘너 너무 빡빡하게 사는 것 같아, 어깨에 힘 좀 빼고 가끔은 늘어지게 만화책도 보는 게 어때? 물론 만화책 보는 시간도 수첩에 적는 거 알지?’ 라고 조언하지 않을까? 어릴 때의 나는 너무 시간이 많아 심심해서 어쩔줄 모를 지경이었다. 넘실대는 시간의 강물에서 마음껏 헤엄쳤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돌아보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나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내가 모자라고 못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건 주변 사람들에게 충분히 애정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껴서였던 것 같다. 나는 항상 사람들의 애정에 굶주려 있었다. 부탁을 잘 들어주면, 재미난 사람이 되면, 전교 20등 안에 들면, 공무원이 되면 사람들이 날 좋아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뒤 재지 않고 번듯하고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다. 숨이 턱에 닿을 만큼 기를쓰고 달렸다. 열심히 해도 바라는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자, 나는 더욱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는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건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멈출 수 없었고, 쉴 수 없었고, 힘을 뺄 수 없었다. 이전까지 그렇게 열심히 해도 애정과 인정을 받을 수 없었는데 덜 열심히 했다가 더 불행해질까봐 겁이 났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분주히 애쓰는 내 마음 한켠에는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식으로 십수년을 살아오면서 바쁜 생활은 어느덧 내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모모>를 감명깊게 읽은 뒤엔 일상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첫 시도는 출근길에 승용차 대신 마을버스를 탄 것이었다. 멍하니 앉아 창밖을 보고 있자니 새삼 버스가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타면 핸들을 틀고 브레이크를 밟고 신호를 살피는 수고를 안해도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나보다 훨씬 운전 잘하는 기사님이 능숙하게 차를 몰아주셨고 얌체 운전자에게 나 대신 욕설도 해주셨다. 예전같았으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겠다고 책을 꺼내들었겠지만 일부러 아무것도 안하고 눈을 감고 있거나 음악을 들었다. 마을버스에 타니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친다. 무릎을 짚으며 한쪽 다리로만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와 라이언 인형이 달린 책가방을 맨 여중생도 보인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해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직장 앞 정류장에서 허겁지겁 내렸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일부러 집앞보다 세네정거장 앞에서 내렸다. 회야천 옆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파란 하늘에 거대한 구름이 느릿느릿 움직인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눈꺼풀같은 낮달이 떠 있다. 가로수 아래에 쌓인 노란 단풍잎을 밟으니 와삭와삭 소리가 난다. 하천이 햇볕을 반사해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새하얗게 빛난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도 자연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조용히 드러내고 있었다.

잠자기 한 시간 전에는 아무 생각없이 놀기로 했다. 주로 <모래시계>, <네 멋대로 해라>같은 수십년 된 드라마를 보았다. 모모의 친구인 기기의 말처럼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을 잊는다. 타인의 절절한 인생 이야기에 빠져들어있다보면 내 삶의 고민을 잠깐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이 생겼다. 자신의 문제에 지나치게 골몰해있는 사람에겐 이따금씩 자신을 잊어버리는 게 필요하다.

나는 터미널에서 다음 터미널로 빠르게 이동하는 것만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했을 뿐 여행 자체를 즐기는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시외버스가 휴게소에 정차했을 때 맥반석 오징어와 어묵바는 안사먹고 화장실만 다녀오는 사람이라고 해야할까? 과정도 목표만큼이나 소중한 것 아닌가? 목표로 걸어가는 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괴롭게 이룬 성취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먼 훗날 운좋게 부와 명예를 얻는다 한들 그것이 현재의 무미건조한 시간을 보상할 수 있을까?

나는 쉬는 걸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휴식 없는 생활방식은 오히려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을 한없이 지체시켰다. 쉬지 않고 닥치는대로 열심히만 하다보니 기력이 바닥난다. 쉬는 시간이 아까워 쉬지 않고, 탈진된 상태로 일을 붙잡고 있으니 지지부진한 상황을 못벗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텅 빈 공간에서 창조성과 활력이 샘솟는 것인데 나는 숨구멍을 틀어막고 스스로를 질식시키고 있었던 셈이다.

사람은 무엇에든 익숙해진다.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 숨가쁜 생활도 익숙해지면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돼버린다. 나 또한 항상 시간에 쫓기면서도 그것이 스스로를 서서히 좀먹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쉴새없이 무언가를 하는 대신 일상 여기저기에 빈 공간을 만들어두니 무기력이 한층 덜어졌다. 훌륭한 작가라는 내 목표는 너무 먼 곳에 있어서 애초부터 숨차게 달리는 방식으론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쉬엄쉬엄 걸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느긋한 마음으로 매일 지치지 않을 만큼만 걸어가는 길은 고통스런 행군이 아니라 재미나는 도보여행이 될지도 몰랐다.

내가 태어나 한번도 현재라는 시간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 죽는 날까지 오로지 현재만이 계속되리란 사실을 섬뜩하게 느낀 적이 있다. 인간은 시간을 현재라는 방식으로만 경험한다.과거나 미래는 생각할 순 있지만 경험할 순 없다. 인간이 가진 건 오로지 현재 뿐이다. 시간을 아낄수록 시간이 없어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현재는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둘 때만 느낄 수 있는데 시간을 아끼려는 순간 다급하고 불안해져 현재를 놓친다. 평생 시간을 아끼느라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평생을 잃는다. 어쩌면 천천히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 시간은 우릴 감싼 하늘과 땅처럼 넉넉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생의 비밀은 차에서 내려 목적지까지 가능한 한 천천히 걸어가는데 있는지도 모른다. 다급히 뛰어가느라 흘깃 지나쳤던 길고양이와 개나리, 무신경하게 흘려버렸던 누군가의 진심, 매일 같다고 생각했지만 단 한번도 같은 적 없던 하루하루, 이것들은 어쩌면 내가 계속해서 흘려왔던 인생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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