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을 배우고 있다. 우리 실습생들은 상담실습을 하며 상담자가 되기도, 내담자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 온라인 회의 프로그램으로 만나서 서로가 상담한 녹취를 공유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서로의 상담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기도 한다.
나는 나랑 같은 조에 있는 H의 말이 이해가 안될 때가 많았다. 같은 조의 다른 사람들의 말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파악은 안돼도 그 문장 자체는 이해가 되는데, H의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를때가 많았다. 앞말고 뒷말이 어떤 논리적 연관이 있는지 이해가 안되거나 맥락과 동떨어진 얘기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이해해보려고 했다. 나는 심리상담을 수련하는 사람이니까 실습과정에서 누군가의 말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들어도 들어도 잘 못알아들어서 어느순간 체념을 해버렸다. H가 말을 하면 아이고, 난 또 들어봤자 이해못할거야 란 생각에 그냥 이해하려는 시도를 안했던 것 같다.
H의 말이 정말로 이해못할만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 마음에 대해 H가 해석을 해준 적이 있는데 토시 하나하나까지 귀에 들어왔다. 그는 내 마음에서 모순되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었다. H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 지금보다는 더 깊게 이해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효율을 따지는 사람이다. 시간과 노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안그래도 과제나 공부할 게 많은 상담실습과정에서 이해하기 힘든 H의 말을 굳이 그렇게 노력하면서까지 이해하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판단에는 심리상담 지도교수가 H와 나눈 대화를 들은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지도교수는 H의 발표를 주변사람 대부분이 못 알아듣는다는 걸 지적했는데 H는 남들이 본인 말을 알아듣든 말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했었다.
지난 조별모임에서 나는 꿍한 마음으로 인상을 쓰고 있다가 H에게 '말이 이해가 안되서 불편하다'는 말을 불쑥 해버렸다. 이 말은 충동적으로 튀어나갔다. 나는 사실 불편한 마음은 있었지만 그냥 참고 이야기를 안하려고 했었다. 이번학기가 한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괜히 불편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나는 불편한 게 있으면 숨겨도 티가 팍팍 나는 사람인데다가, 가스렌지위의 압력밥솥처럼 부글부글하다가 나도 모르게 삐익~~~ 하며 터져나오곤 하는 것이다.
H씨가 당신이 불편한 게 나한테 책임이 있다는 전제하에 묻는거냐고 했을 때 나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지만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인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나의 불편함과 괴로움의 책임을 H에게 돌리고 있었다.
H는 맥락과 동떨어진 얘기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풀어내는 경우가 많아서 약간은 푼수끼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굉장히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내가 자신의 말을 불편해하는 것까지 하나하나 다 눈치채고 있었다.
나는 H의 말을 이해못하는 것이 불편하고 답답했다. 말이라는 건 소통을 전제로 하는 거 아닌가? 왜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안하는거지? 나는 내 불편함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지도교수의 권위'를 끌어왔다. '마음읽기에 통달한 지도교수도 지적한 적이 있으니 H한테 책임이 있다! 내가 불편하고 괴로운 건 H탓이다!
나는 수업시간에 질문을 적극적으로 못하는 편이다. '바보같은 질문이라고 혼나지 않을까, 면박듣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질문할까 고민고민하다 못 물어볼 때도 많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생각한 그대로 말했다가 상대 기분이 상할까봐 돌려돌려 말할때가 많다. 어렵게 본심을 꺼낼 때도 직설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쿠션에 매트리스에 공기풍선까지 잔뜩 깔아서 상대가 최대한 기분상하지 않게 말하려는 편이다. 내가 말해서 상대가 기분나빠할까봐 늘 신경쓰는 것이다. 그래서 미움을 피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다른사람 기분안상하게 하려고 하는데, H는 왜 못알아듣게 말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왜 이해되기 쉽게 말하려고 노력하지 않나? 나는 스스로를 통제하느라 이렇게 애쓰는데, H는 남이 힘들든 아니든 신경 안쓰고 저렇게 말하는 게... 억울해. 나는 다른사람 눈치보고 말하느라 힘든데, 저사람은 눈치 하나도 안보고 저렇게 말하는 게 억울해.
사실 나는 나쁜생각, 못된생각, 차별적인 생각, 반인권적인 생각, 상대가 기분나쁠만한 생각을 마음에 많이 품고 있지만 상대가 어떻게 느낄지를 생각해 거르고 걸러서 말해. 그래서 내가 이걸 있는 그대로 쏟아내면 관계가 파탄날 것 같고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줄 것 같아.
여기서 보이는 내 모습은 남들이 별로 신경을 안쓸 때조차 남의 눈치를 보며 말을 할 때가 있고, 내가 불편해도 참고 남을 배려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이따금 그것이 정신병원 구속복처럼 걸거치고 답답할 때가 있지만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남을 배려 안하고 생각하고 행동했다가 내 주변의 관계가 망가질까봐 두렵다.
내가 눈치를 보는 건 사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가 희미하니 스스로는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어려워지고, 타인의 반응으로 나를 확인할수밖에 없다고 믿으니 자꾸 타인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치를 보는 건 부차적인 문제고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지를 알아채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내 생각과 말과 생활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만 내가 스스로를 '못난 사람'이라는 틀로만 바라보기에 못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해야 할 것 같다.
H가 장황하게 말을 하더라도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고, 나는 이해못하는 것을 넘어 불편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를 보아야 사안인데, 나는 H에게 책임이 있다고, H가 알아듣게 얘기하는게 맞다고 단정지어 버렸다. H가 일부러 못 알아듣게 얘기하는 게 아니다. H는 본인의 감성과 생각대로 말하는 것 뿐이다. 내 불편함은 나의 것이지, 그의 책임은 아니다.
이번 조별모임 녹음파일을 들으며 부끄러워서 몇 번이나 정지버튼을 눌렀다. 스스로의 불편함을 H에게 떠넘기는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그렇게 드러난 내 모습이 너무 찌질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라고 믿는 모습, 내가 타인에게 보여지길 바라는 모습은 의젓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성찰하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한 선비같은 모습인 것 같다. 항상 스스로를 성찰하는 성숙한 인간. 그런데 이 국면에서 드러난 내 모습은 '철구가 놀렸어요, 하룡이가 제 연필 부러뜨렸어요'라고 말하는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실제의 나는 공자, 맹자, 묵자가 아닌 정말 평범하면서도 한편으론 개성적인 한 명의 사람일 뿐이다. 실제의 나는 맨날 속으로 썰렁한 농담 생각하고, 인터넷에 웃긴 짤 찾아서 모으고, 불법다운받은 만화책을 보고, 속 좁기도 하고, 꿍하기도 하고, 꼬여있기도 하고, 삐지기도 하고, 때론 혼자서 질질 짜는 그런 사람인데... 너무 의젓하고 믿음직하고 멋진 사람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괴롭혀온 면도 있는 것 같다. 공자, 맹자, 묵자가 되는 게 몸에 안 맞는 옷처럼 불편하다면 나는 그냥 마음 편한 푼수같은 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