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잔기침과 가래증상이 심해질 때가 있다. 이럴때면 불안해진다. 요새 달리기를 소홀히 했나? 달리기 강도를 높여야하나? 내 몸은 가만 놔두면 언덕길 공처럼 굴러내려가니까 운동으로 끌어올려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 잔기침과 끓는 가래는 내 마음이 몸을 통해서 보내는 신호라는 생각도 한다. 내가 인지하지 못한 부담, 답답함, 혹은 상충되는 믿음이 몸을 통해 드러난 것이란 생각도 한다. 그래서 마음을 살피며 '어떤 마음이 통증으로 드러났는지' 살피려 한다.
즉 나는 신체증상을 몸 자체의 일이라고 여겨 운동을 통해 완화시키려는 것과 동시에 마음과도 연관있다고 여겨 마음을 살펴서 통증을 완화시키려고 한다. 즉 몸토끼와 마음토끼 두 마리를 다 잡으려는 것이다.
이것은 폐가 안 좋아진 것은 '심리적 요인'때문이지만 폐가 나아진 것이 '운동과 식이요법' 덕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은 마음과 몸에 영향을 미치지만 몸은 몸에만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 마음과 몸을 분리해서 보고 있다.
이것은 통증심리에서 배운 '마음의 아픔이 몸으로 나타난다'는 얘기와 어긋나 있다. 통증을 제거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통증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정체성과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으로는 진전이 안되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미로의 같은 지점을 뱅뱅 돌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통증을 느끼면 마음을 살펴서 통증과 연관된 믿음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통증이 사라지길 기대한다. 이따금 스스로의 믿음을 확인해서 통증이 완화될때가 있는데 그럴때면 마음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통증이 사라지면 마음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통증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안도하는 경향이 있으며 통증이 사라지면 그 시점에서 마음을 인식하려는 노력을 멈추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마음읽기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인식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겉으로는 정체성과 의미를 인식하고싶다고 하지만 마음을 살펴보는 목적이 통증제거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목적이 달성되면 이제 됐다며 그 지점에서 멈춰버리는 것 같다.
너에게 통증에 대한 마음읽기는 뭐니?
겉으로- 통증의 의미를 파악해서 그것을 내 삶에 반영해 잘 살아가는 것이요.
속으로- 통증과 연관된 믿음을 찾아내 통증을 없애는 것. 통증이 없어졌으면 내 마음 잘 읽은 것 아닌가요? 내가 특정한 믿음을 확인하고 내 통증이 없어졌으니 그것이 내 마음 아닌가요? 휴 몸이 불편해서 너무 괴로웠는데 통증이 없어지니 좀 살것 같아. 이제 내 마음 인식한 거 아닌가?
그럼 니 정체성과 의미는 뭐라고 말할 수 있겠니?
모르겠는데...
나는 살아오면서 항상 정답을 추구했다. 정답이란 그것만 되면 내 삶이 바뀌리란 믿음이다. 나에게는 번듯한 직장을 얻거나 책이 잘 되거나 여자친구가 생기거나. 그런데 내가 정답을 꽉 움켜쥐고 있는 한 나는 내 문제를 파악할 수 없었다.
이 지점에서 내가 가진 정답은 통증과 부합되는 믿음을 찾아서 통증을 제거하는 것 아닐까.
폐가 나빠진 건 긴 시간을 들이며 노력했던 책작업이 잘 안돼서, 인식하지 못한 좌절감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맞는 말이긴 한데 그것으론 부족하다. 책이 잘되길 바랐다고 하지만 마음을 한겹만 벗겨보면 애초부터 좋은 결과가 나올거라고 믿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못난 사람'이란 틀로 보면서 스스로를 부정한다. 폐의 아픔은 그러한 자기부정의 결과에 가깝다.
나에게 건강이 좋아졌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에게 몸의 아픔은 스스로를 못난 사람으로 보는 것, 자기부정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몸이 나았다는 것은 내 안에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바뀌었다는 걸 뜻하는데 나는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운동'을 통해 나았다고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운동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바뀌었다고 한다. '무릎이 아파서 못뛴다고 생각했는데 달리기를 하며 무릎관절이 멀쩡하단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소화기관에 문제가 있어서 살이 안찐다고 생각했는데 체중도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몸상태가 안좋아질까봐 걱정한다. 문제있다고 여겼던 몇몇 신체부위에 이상이 없다는 건 확인했으나 여전히 내가 '아픈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스스로가 아픈 사람이라는 믿음은 그대로 유지한채 몸만 좋아진 것이다.
나는 이십대 중반 이후 10년 넘게 허약하고 빼빼마른 몸으로 살아오면서 건강해지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았다. 운동을 하고 밥도 잘 챙겨먹으려 한다. 하지만 달리면 무릎이 아파오고, 근력운동을 하면 팔꿈치, 손목이 아파온다. 식사량을 늘리면 속이 부대낀다. 그렇게 벽을 만나면 나는 '관절이 안 좋아서, 소화기관이 약해서 어쩔 수 없어' 일상생활하는 것에 만족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며 노력을 그만둬버린다. 이것은 내가 아픈 사람이고 아플 수밖에 없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내게 통증은 '나는 못한다'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는 통증이 나타나면 운동을 그만두었다. 이때는 통증이 무릎관절 주변으로 찌릿찌릿하게 퍼져가는데도 달리기를 이어갔다. 스쿼트를 하며 옆구리며 무릎이 아파와도 '난 척추가 휘어있어서 스쿼트는 무리야'라고 해석하지 않고 그냥 했다. 그렇게 1년 정도 운동을 이어갔다.
나는 내 몸이 아프단 걸 지동설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내 행동은 그 믿음의 반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1년간 끈질기게 운동과 식이를 한 것은 환자의 마음이 아닌, 건강하게 살고싶은 마음을, 의지를 끈질기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환자라는 자기규정보다 '건강한 몸으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고픈 마음을 더욱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매번 운동을 할 때마다 건강한 몸을 생생하게 느꼈다. 내 상태가 나아진 이유는 건강하게 살고픈 마음을, 아픈채로 살겠다는 마음보다 강하게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에게 몸이 나았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몸은 마음의 상태를 반영한다. 이것은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이 바뀌었음을 뜻한다.
나는 스스로를 못난 사람이라는 틀로 본다. 나는 스스로를 마음을 읽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으로 본다. 이 두 문장을 더하면 '내가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확인하는 것은 스스로의 못난 모습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의 마음을 읽는다고 하면서 보는 것은 '나는 못난 사람이다,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뭔가를 할 수 없다'는 믿음만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분명히 이런 믿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내 모습 전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못나고 못한 사람이란 렌즈로만 볼때는 내가 해냈거나 해낼 수 있다는 것, 즉 스스로의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내게는 건강한 몸으로 내 인생을 소중히 여기면서 뭔가 소중한 걸 이뤄가고픈 마음이 있었다. 해봤자 안된다며 체념하고 도망가려는 마음보다 더 강한, 해내고픈 욕구가 있었다. 운동은 그 마음의 강력하고 지속적인 표현이었다.
나는 스스로의 의지, 주체성, 잘 살고픈 욕구등에 주목하지 않았고 그것을 심드렁하게 보았다.
나는 운동으로 몸이 회복된 게 그리 큰 성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몸이 아팠던 게 낮은 등급이라면 이제는 그냥 보통이 된 것 뿐인걸. 그냥 보통이 된 것 뿐인데 그것을 어떻게 성과로 볼 수 있겠어.
나정도로 폐가 망가진 상태에서 회복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나는 이것을 하루하루 노력해서 얻어냈음에도 이것을 성과로 인식하지 않는다. 사실 성과로 인식하면 안되는 것이다. 나는 못하는 사람이어야 하니까.
아픔이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나는 스스로를 못난 사람이란 틀에 넣어 부정하고 외면했다. 나의 아픔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외면하고 부정할 때 마음이 몸을 통해 보낸 경계경보였을 수 있다. 스스로를 부정하고 무시하고 탓하길 그만두라는 신호였을 수 있다. 나는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자있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인식해온 것이니까.
또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며 살아온 내게 너가 어떤 사람인지 인식해서 너만의 기준대로 살아보라는 신호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