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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Feb 19. 2019

레드를 자유롭게 해준 건... <쇼생크 탈출> 2부

쇼생크 탈출

감옥에서 의미있는 일을 해내기 위해선 권력의 도움이 필요했다. 앤디는 독보적인 금융지식과 수완으로 노튼 소장이 부정하게 긁어모은 돈을 깨끗하게 세탁하고 불려준다. 소장은 대신 앤디가 도서관을 확장하고 죄수들에게 고등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허락한다. 노튼은 성경을 끼고 다니면서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부패한 관료일 뿐이다. 토미가 나타난 건 노튼 소장에게 무척 불편한 일이었다. 토미는 앤디가 누명을 쓴 살인사건의 진범에 대해 증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재산을 충실하게 불려줄 회계사가 사라질 뿐 아니라 그의 비리가 세상 밖으로 노출될 위험이 생겼다. 두 사람의 인생과 부당이득 중에서 노튼은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한다. 그는 해들리를 시켜 교도소 외벽에서 토미를 저격하게 한 후 탈영에 의한 사살로 위장했다. 독방에 장기간 가두며 앤디 신변에 위협을 가했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몇 년간 공들여 만든 도서관을 허물겠다며 협박한다. 쇼생크 최고 권력자의 막강한 힘 앞에 앤디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앤디의 고통과 절망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한다. 앤디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두 명이 죽은 살인사건의 범인이 되었다. 그 중 한명은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였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명높은 쇼생크에 갇힌 첫 두해, 앤디는 보거스 패거리에게 수시로 엊어맞고 강간당한다. 19년의 수감생활후에 그의 무고를 증명해줄수 있는 유일한 증인 토미가 나타났을 때 노튼은 주저하지 않고 그를 죽인다. 앤디의 희망은 좌절과 눈물을 함께 감싸안고 있다. 그가 희망을 품는 일이 그리 녹녹치 않았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레드는 독방에서 나온 앤디가 자살을 생각하는 위험한 상태라고 여겼다. 넋 나간 표정으로 남태평양이니, 모래사장의 별장이니 하는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헤이우드에게 6피트 길이의 밧줄을 얻어갔다는 소식은 레드의 불안을 부추긴다. 토미가 살해당한 충격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져 버린걸까? 앤디가 낙천적인 성격이라지만 누구에게나 한계점은 있기 마련이다. 앤디의 생명을 염려했던 긴 밤이 지난 후 소장과 교도관들이 앤디의 감방에서 발견한 건 목매단 시체가 아니라 커다란 포스터에 가려진 기다란 구멍이었다. 앤디는 누구도 뚫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두터운 벽을 파내고 쇼생크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전 장면에서 죄수 무리가 도서관에서 책을 분류할 때 등장했던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탈옥을 암시한다.)



 앤디의 탈옥장면은 그의 수감생활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똥과 오물로 범벅된 450미터 길이의 좁은 하수관을 기고 또 기어서 그토록 염원했던 자유로운 공간에 도달한다. 100미터 달리기를 해본 사람이라면(또는 군대에서 엎드려 포복을 해본 사람이라면), 450미터를 기어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온몸에 오물을 칠갑한 채 하수관을 기어갈 때는 영원히 하수관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앤디가 감옥에서 겪은 고통의 시간도 그러했을 것이다. 질나쁜 녀석들에게 구타당하거나 깜깜하고 좁은 독방에 갇혀 끝없는 시간을 보낼때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견디는 것 뿐이었다. 어떻게든 살아가자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탈옥 장면에서 깊은 인상을 받는 이유는 이 장면이 살다보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에 한번쯤은 똥무더기로 가득찬 오수관를 기어가게 된다. 이 긴 하수관를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다른 방법은 없다. 입을 다물고 악취를 견디며 하수관이 끝날때까지 기어가는 것뿐이다. 이 고통스러운 길마저도 내 인생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하수관에서 기어나온 앤디는 어둠속에서 양팔을 벌린채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자유를 만끽한다. 긴시간의 설움과 눈물이 후련하게 씻겨나가는 이 영화의 절정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앤디가 19년동안 매일 밤 작은 조각망치로 굴을 파왔다는 사실이다. 탈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앤디의 희망은 오랜 시간에 걸쳐 뼈를 깍는 노력으로 조각되었다.



앤디의 희망은 치밀하고 구체적이었다. 그는 탈옥의 모든 요소를 철저하게 계산했다. 교도소장의 장부를 바꿔치기하고, 탈옥후 입게될 양복과 구두를 빼돌렸으며, 번개치는 날에 탈옥을 감행해 하수관을 돌로 내리치는 소리를 숨겼다. (10년마다 포스터의 여자배우를 바꿔 따분한 탈옥준비에 활력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앤디의 희망은 ‘감옥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고 싶어’처럼 막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남태평양의 ‘지후아타네호’에 호텔을 열고 손님들과 낚시를 다니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품고 있었다. 

 희망은 대량생산되는 복제품이라기보단 개인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에 가깝다. 멋져보인다는 이유로 타인의 희망을 덥썩 구매해선 안된다. 자신의 희망은 스스로 정의하고 키워내야만 한다. 그래서 희망을 간직하고 실제로 실현해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작업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끈질기게 실천하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 레드의 이야기가 남았다. 이 영화에는 레드의 가석방 심사 장면이 세 번 나온다. 수감된 지 20년, 30년째, 그리고 앤디가 출옥한 직후에 세번째 가석방 심사가 있었다. 쇼생크의 가석방 심사는 보여주기식 연례행사다. 어차피 내보내지 않을 종신형 죄수를 심사한 후 부적격 판정을 내리거나 너무 늙어서 오락가락 하는 죄수들을 사회로 내쫓는 수단일 뿐이다. 앞선 두차례의 심사에서 레드는 면접관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잔뜩 위축된채 자신이 교화되었다는 판에 박힌 말을 늘어놓을 뿐이다. 앤디와 보낸 20년의 시간은 레드에게도 특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체념에 익숙해져 있던 레드에게 앤디는 희망에 대해 말했고, 끈질긴 집념으로 희망을 실현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모든 걸 지켜봐 온 레드는 이전의 그와 다른 사람이다.



레드는 더 이상 심사관들의 눈치를 보며 불안해하지 않는다. 얌전한 모범수인양 스스로를 포장하지도 않는다. 40년의 수감생활이 자신에게 알려준 것들을 담담히 이야기할 뿐이다. 젊은 시절에 저지른 단 한번의 끔찍한 범죄로 철저하게 망가져버린 인생, 애타게 후회하지만 결코 되돌릴수 없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서글픈 삶에 대해 진솔한 태도로 말한다. 그는 후회로 점철된 자신의 삶이라도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배운 것처럼 보인다. 레드의 희망은 언젠가 감옥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었다. 그는 앤디에게 회색 감옥에 살아야 하는 죄수라도 독방 한켠에 꽃을 심어 가꿀 수 있음을, 작은 하모니카를 불 수 있음을,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이 작지만 소중한 깨달음이 레드를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었고 역설적이게도 가석방심사관들은 레드의 의연한 태도에 감명을 받는다. 레드는 세 번째 가석방 심사 서류에 붉고 선명한 ‘승인’ 도장이 찍힌다.



 브룩스가 그랬던 것처럼 레드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 또한 40년동안 감옥에 살았고 허락받지 않고는 오줌조차 눌 수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익숙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이 괴로웠던 레드는 다시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감옥에 돌아가고픈 유혹을 느낀다. 그의 마음을 붙드는 건 언젠가 앤디와 했던 약속이다. 볕이 좋은 휴일, 레드는 앤디가 말했던 벅스톤으로 길을 떠난다. 얻어탔던 빨간 트럭의 짐칸에서 내려 끝없이 목초가 펼쳐진 시골길을 걷고 또 걷는다. 날씨가 무덥고 땀이 난다. 모자를 벗고, 자켓을 손에 들고 걷는다. 한참후에야 앤디가 말했던 커다란 떡갈나무와 돌담길이 보이는 장소에 도착한다. 나무 아래에서 번쩍이는 흑요석을 들어내고 앤디가 묻어둔 편지를 읽는다. 


...

레드, 희망은 좋은 거예요. 좋은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

 레드는 커다란 떡갈나무를 찾아 벅스톤으로 갔지만 동시에 자신의 내부로 난 길을 향해서도 걸었다. 한참동안 홀로 걸으며 그는 자신에게 되풀이해 물었을 것이다. 희망이란 무엇인지, 길들여짐이란 무엇인지, 자유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을 속박했던 건 외부의 환경과 조건이 아니라 마음속에 자리한 자기부정과 새로운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단 걸 깨달았을 것이다. 앤디의 편지를 읽은 레드는 남태평양을 향해 또다시 긴 여행을 시작하지만, 레드를 자유롭게 해준 건 앤디의 편지가 아니라 레드 자신이었다.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으므로. 레드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는 앤디의 편지를 받고도 구차한 일상에 머무르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주거제한지역을 이탈해 좌석버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태평양을 향해 가는 레드의 미소띤 얼굴이 보인다. 가만히 앉아있기 힘들 정도로 가슴 뛰는 흥분을 느낀다. 자유인만이 맛볼 수 있는 기쁨이리라.

이 영화는 희망에 대해 지독하게 냉소적이었던 레드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된다.


국경을 넘을 수 있길 희망한다.

태평양이 내 꿈에서처럼 푸르기를 희망한다.

친구를 만나 악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https://brunch.co.kr/@isummertreehill/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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