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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Feb 19. 2019

레드를 자유롭게  해준 건...<쇼생크탈출> 1부

쇼생크 탈출

이 이야기는 레드의 침착한 내레이션과 함께 전개된다. 레드는 어느감옥에나 한명은 있을 법한 암거래상으로 죄수들 사이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인물이다. 그는 교도소에서 구경하기 힘든 물건을 능란한 수완으로 유통하고 수수료를 챙긴다. 앤디가 부인 살해 혐의로 교도소에 들어왔을 무렵 레드는 살인죄로 20년째 복역중이었다.  


교도소에 갓 들어온 신입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적,육체적인 괴로움을 겪는다. 간수들은 곤봉으로 명치를 가격하며 욕설을 내뱉고 알몸에는 벼룩을 제거하기 위해 독한 해충제를 뿌린다. 철창이 닫히고 감방에 홀로 남겨지면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실감하게 된다. 신입이 들어온 첫째날은 골려먹기 좋은 날이다. 고참들은 어떤 신참이 가장 먼저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릴지를 두고 담배 내기를 한다. 헤이우드는 자신이 찍은 뚱보 신참을 집요하게 겁줘 일등으로 울게하는데 성공하지만, 뚱보는 눈치없이 결백을 주장하다 간수장 해들리에게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실신한다. 다음날 식당에서 간밤에 뚱보가 과다출혈로 죽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되고 잠깐의 침묵이 흐를 때 앤디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였죠?”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은 가슴 오른편에 붙은 번호로 불린다. 하루만에 죽은 죄수 이름 따위 몰라도 그만이다. 하지만 앤디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 쇼생크의 삭막한 현실과 대비를 이룬다.

 자유시간, 교정을 거니는 그는 다른 죄수들과 어딘가 달라보인다. 바닥의 작은 돌을 주워 공기놀이하듯 던졌다 받으며 걷는 그는 자신의 정원을 산책하는 사람처럼 여유롭다. 앤디와 레드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다.


“소문에 너 정말 건방진 녀석이라던데?”

레드가 말하자 앤디는 되묻는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앤디는 ‘전 건방진 사람이 아니예요. 그 소문은 거짓이예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레드의 생각을 물었을 뿐이다. 이 질문은 앤디가 생각하는 방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집단생활에선 소문의 영향력이 크다. 사람들은 함께 지내면서 오랜 시간을 두고 타인을 판단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평하는지 살펴보고 그 결론을 따라간다. 스스로 생각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고, 무리의 결정과 엇나갈 염려가 없어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몇마디 소문으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존재다. 풍문에 따른 판단은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수 있는 기회를 차단해버린다. 앤디는 무비판적으로 평판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경험하고 스스로 생각해 판단하는 게 중요하단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다. 레드에게 다가가기로 결심하기 한참 이전부터 앤디는 레드를 살펴보며 믿을만한 사람인지를 가늠했다.


 앤디는 과거 은행근무경력과 영민한 두뇌를 십분 활용한다. 지붕보수를 위해 교도소 옥상에 올라간 레드 무리와 앤디가 바닥에 타르를 칠하고 있을 때 간수들의 대화가 들린다. 간수장 해들리의 백만장자 동생이, 죽으면서 유산 3만5천달러를 남겼지만 세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 앤디는 잡담중인 간수들에게 접근해 ‘해들리씨, 당신 부인을 믿으십니까?’란 도발적인 질문을 한 후 성난 해들리에게 멱살을 잡혀 옥상 난간 끝으로 밀쳐진다. 위급한 상황에서 앤디는 부인에게 유산을 증여하면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고 복잡한 서류업무를 처리해주겠다는 제안을 해 역으로 해들리의 신임을 얻어낸다. 그 대가로 앤디가 요구한 건 동료 한 사람당 3병의 맥주를 제공받는 소박한 편의였다. 지붕보수가 끝나는 날, 작업에 참여했던 죄수들은 5월의 햇볕을 맞으며 옥상 여기저기에 앉아서 얼음통에 담긴 맥주를 마셨다. 그들로선 몇 년만에 마셔보는 차가운 맥주였다. 잠시였지만 재소자들은 자신의 집 지붕을 고친 후 맥주를 마시는 듯한 기분좋은 자유를 누렸다. 


 자신에게 보내진 책꾸러미를 정리하러 갔다가 우연히 소장실에 혼자 남겨진 앤디에게 레코드판이 보인다.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앤디는 간수가 들어간 화장실 문을 바깥에서 잠그고 소장실 외부 출입문에 걸쇠를 건다. 축음기에 ‘피가로의 결혼’ LP판을 재생시키고는 교도소의 방송 스위치를 모두 켠다. 삐익- 약간의 잡음이 울린 뒤 회색 교정 곳곳에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제재소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자 누군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던 절단기 스위치를 꺼버렸다. 갑자기 들려오는 이탈리아 여인의 노래에 연병장에 있던 수천명의 죄수들은 넋을 잃은 채 걸음을 멈추고 스피커의 선율에 귀를 기울인다.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듯한 숭고하고 고운 목소리다. 음악은 교도소의 철창은 아랑곳하지 않고 죄수들의 삭막한 마음으로 흘러든다. 죄수들의 영혼은 한 번도 도달해보지 못한 하늘 높은 곳으로 솟아 올랐다. 음악이 울려퍼지는 잠깐 동안 쇼생크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꼈다. 소장실 점거 사건으로 이주간 독방 신세를 져야 했지만 앤디에게 그정도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앤디는 희망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동료들에게 햇살을 맞으며 찬 맥주를 마시게 해주고, 오페라를 들려준 건 척박한 환경에 사는 죄수들에게 희망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쇠와 돌로 만들어진 회색공간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란 걸, 누구나 마음속에는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자신만의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키워나가야 한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레드가 보기에 앤디는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 희망은 좋은 말 같아보인다. 희망은 가슴을 뛰게 하고 보다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하지만 교도소에서 종신형을 살아가야하는 이들은 희망보다 절망에 익숙해져야 한다. 기대하기보단 체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구타와 일상적인 모욕에 둔감해져야 한다. 목숨을 이어가는 것 이상의 무엇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 헛된 희망은 사람을 초조하고 미치게 만들 뿐이다. 레드는 희망에 대해 지독하게 회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출옥했던 브룩스가 죽었을 무렵 레드는 교도소에서 30년째 복역중이었다. 인생의 젋은 시절 교도소에서 흘려보냈고 죽는 날까지 높은 확률로 교도소에서 살아가게 될 그의 삶을 생각해보면 레드의 반응은 수긍할 만하다.



브룩스는 50년 넘게 교도소에서 지내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 쇼생크에서 쫒겨났다. 가석방 허가가 났을 때 브룩스는 인질극을 벌이면서까지 쇼생크에서 나가지 않으려 했다. 그에게는 바깥 세상이 미지의 정글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교도소에서 일평생을 보낸 그에게 교도소는 직장과 집이었고 간수와 죄수들은 가족이었다. 낯선 세상을 배우기에 그는 지나치게 늙어버렸다.

 자신과 동료들의 예상처럼 브룩스는 적응하지 못했다. 세상은 너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수많은 차들이 도로를 질주했고 사람들은 낯설고 불친절했다. 밤마다 악몽을 꿨고 잠에서 깨면 어디인지 알아차리는 데 한참이 걸렸다. 교도소는 그를 길들여버린 것이다. 두려움이 계속되는 삶을 더 이상 견디지 않기로 마음먹은 브룩스는 ‘브룩스 여기 있었다.’란글씨를 대들보에 새기고 하숙집 서까래에 목을 맨다. 



감옥은 보이지 않는 강한 힘으로 죄수들을 마음까지 무릎 꿇린다. 쇼생크의 죄수들은 ‘길들여짐’과 싸운다. 그들은 끔찍이도 싫어했던 막힌 벽과 철창에 어느샌가 익숙해져버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엔 감옥이 아닌 곳에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이 된다. 감옥 바깥에 사는 이들 역시 길들여짐과 싸워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사회 조직이든, 개인을 둘러싼 환경이든, 긴 시간동안 특정한 공간에서 부자유와 속박을 경험한 사람들에겐 좌절과 무기력의 정서가 뼈속 깊이 새겨진다. 속박의 공간은 괴롭지만 한편으론 견딜만큼은 익숙해지며, 어느 순간 그곳에 의존하게되는 지경에 이른다. 길들여진 이는 스스로의 생명력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려, 시간이 흘러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상황이 와도 죄수로 남는 쪽을 선택한다.



 이 영화를 수십번 되풀이 해 보았다. 어릴 때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길 바라기 마련이다. 처음 봤을 때 나는 ‘앤디’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했던 것 같다. 쇼생크의 열악한 환경, 극한의 고난을 견디면서도 희망을 간직하고 끝내 실현해내는 앤디에게 감탄하고 열광했었다. 앤디의 매력적인 인품, 뛰어난 두뇌, 번쩍이는 기지에 감탄하며 나또한 그를 닮은 사람이길 바랐다. 

십수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나는 스스로가 앤디보다 레드에 가까운 사람이란 사실을 마음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지난 삶은 앤디보다는 레드와 가까웠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희망을 가꿔가는 앤디같은 사람을 동경했지만 정작 스스로의 삶에서는 희망을 실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모니카를 불지 못하고 다시 상자에 넣어버리는 레드처럼,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지 못했다. 나를 둘러싼 벽을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았고 태평양처럼 광활하고 낯선 곳으로 가면 무서워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마음 깊은 곳에 ‘앤디는 특별한 경우야. 나는 안될 거야’란 회의가 깊게 뿌리내려 있었고, 그 회의는 내 생각과 행동을 좁은 틀에 가두었다.

 평범한 레드라 해서 희망을 실현시킬 수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앤디는 누구에게나 희망의 씨앗이 있고 그것을 키워낼 힘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자 했으니까. 앤디가 보여준 드라마틱한 희망은 희망의 다양한 형태 중 하나일뿐이다. 거창하고 번듯하지 않아도 괜찮다. 레드는 자신만의 희망을 가꿔가면 된다. 레드에게 필요한 건 스스로가 희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다. 그 믿음을 가지기 위해 스스로를 격려하고 힘껏 설득할 사람은 레드 자신밖에 없다.


2부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isummertreehill/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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