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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Aug 14. 2019

1. 왜 하필 나입니까?



우리는 곰팡내 나는 지하실과 비좁은 감옥에 앉아서

금가고 파괴적인 운명의 기습을 받아 신음한다. 

우리는 결국 사물에 그릇된 광채와 잘못된 존엄성을 더 이상 부여하지 않고

사물을 그대로 구제받지 못한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한다.    


-나치의 감옥에서 죽은, 알프레드 델프        




 2010년의 늦은 봄 오후, 나는 독서실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갑자기 목과 등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몸 안에서 무언가가 충돌하는 듯한 당혹스러운 아픔이었다. 독서실을 나와 근처에 있는 정형외과를 찾았다. 엑스레이 사진을 본 의사는 일자목에 목디스크인 것 같다고 했다.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몸 안의 꺼림칙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고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왔다. 돌이켜보면 그날은 끝을 알 수 없는 고된 여정이 시작된 날이었다.    



 몸이 갑작스럽게 망가진 건 아니었다. 2년 전부터 몸에 갖가지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왼쪽 무릎 통증이 심해져 수술을 받고 재활치료를 했다. 엉덩이 부위에 시뻘겋게 건선이 일어나 매일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라야 했다. 소화력이 약해져서 음식이 얹혀 고생할 때가 잦았다. 무엇보다 척추 상태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어깻죽지가 석고처럼 딱딱했다.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었다. 허리를 곧게 세우려 하고 독서대를 쓰고 틈틈이 스트레칭을 했지만 통증으로 30분도 채 앉아있을 수 없었다. 매일 시간을 내서 걷기 운동과 체조를 하지 않으면 이 덜떨어진 몸상태조차 유지되지 않았다.    



 산 무너지는데 바늘 찾고 있다는 속담이 있다.  당시 나는 대학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휴학을 한 뒤 토익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번듯한 기업에 입사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몸이 아프면 쉬엄쉬엄 공부해야 할 텐데 무턱대고 책상에 앉아 있기만 했다. 통증 때문에 앉아있기가 힘들어지면 일어나서 책을 봤다. 책상 위에 의자를 올려 그 위에 책을 두고 공부하는 식이었다. 아픈 몸으로 하는 공부가 잘 될 리 없었다. 나는 그저 겁이 났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취업을 위해 죽자살자 공부할 텐데 나만 넋 놓고 있기가 불안했다.    



 상태가 더 나빠져 의자에 앉는 동작을 취하기가 어려워졌다. 잠시만 앉아있어도 등허리가 아파왔고 목 근육이 경직돼 숨 쉬는 게 힘들었다. 살아가려면 앉는 동작이 필수적이란 당연한 사실을 아프고 난 후에야 실감했다. 사람은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일상의 대부분을 앉아서 보낸다. 앉아서 업무를 보고, 책을 읽고, 티브이를 본다. 앉을 수 없다는 건 눕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한다는 걸 뜻한다. 사람들이 별다른 의식 없이 손쉽게 행하는 동작이 내게는 거북스럽고 어려워졌다. 앉을 수 없는 사람은 남들처럼 학교에 다닐 수도 회사에서 일할 수도 없다. 



 정형외과의 재활센터에 등록했다.  한주에 세 번 센터에 가서 허리와 목근력 강화, 좌우 균형 회복운동, 척추를 곧게 만든다는 체조를 했다. 목 견인 치료와 마사지도 받았다. 2개월이 지나고 3개월이 지났는데도 상태는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아픔을 호소하는 나를 실장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재활센터에 나정도로 증상이 심각한 환자는 없었다. 내 증상은 상당히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물리치료와 병원 재활치료로는 병을 고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활센터에 나가는 걸 그만두었다.    



 난감한 건 통증이 있는데 병명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의사들은 일자목, 디스크라는 진단은 내렸지만 수술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인터넷을 뒤지며 내 병이 무엇일지 추측했다. 척추 측만증인가? 강직성 척추염일까? 고민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검색 중에 자가치료 정보가 담긴 웹사이트를 발견했다. 허리 통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자기 몸을 고치기 위해 척추교정 운동을 개발하고 사이트도 만든 것 같았다. 사이트에는 이 운동으로 통증에서 벗어났다는 후기가 여러 개 있었다. 치료자가 펴낸 책, 고안한 운동기구를 주문해 운동을 시작했다. 양다리를 끈으로 묶고 몸을 활처럼 펴는 자세를 취하거나 바닥을 구르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한 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통증이 완화되는 경험을 했다.     



나는 괴로운 나날을 꾸역꾸역 견뎌내고 있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목과 어깨가 겁날 정도로 아팠다. 움직이면 통증이 심해져 한참을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통증은 깨어있는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벽에 기대앉아 밥을 먹을 때(바닥에는 잠깐이나마 앉을 수 있었다)와 누워서 책을 볼 때를 제외하면 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앉지 못하고 계속 서있는다는 건 고된 일이다. 30분이고 50분이고 계속 서있다 보면 다리에 피로감과 통증이 누적된다. 잠깐 앉았다가 일어나 다시 서있는다. 이 패턴은 하루 종일 반복된다. 목과 허리가 아프다. 몸의 불편함 때문에 무언가에 집중하는 게 어렵다. 이불을 덮어쓰고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것처럼 정신이 없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누군가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만 해준다면 내가 가진 돈과 물건을 전부 줄텐데.    



 나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조난자 같았다. 일상은 코와 입으로 연거푸 짠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숨 막히고 괴로웠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조금 효과를 본 새로운 운동에 매달렸다.  구르기 운동으로 효과를 봤다는 체험수기가 많았다. 하루에 1000번씩 굴렀다는 사람도 있었다. 다리를 묶고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채 수백 번씩 바닥을 굴렀다. 500번 구르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운동을 끝내고 나면 입고 있던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구르고 나면 플라스틱처럼 딱딱했던 근육이 조금은 말랑해졌고 통증도 덜해졌다. 정상적인 허리는 완만한 C자 곡선을 지니고 있다. 내 허리는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하게 역 C자 모양으로 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구르기 운동을 하자 등허리에 상처가 생겼다. 뼈가 도드라진 부분의 살갗이 바닥에 반복적으로 짓눌리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작았던 상처는 구르는 나날이 누적되면서 깊고 커졌다. 고통을 참으며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척추선을 따라 여기저기 난 상처에 딱지가 앉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티셔츠 등 쪽이 피와 진물 자국이 배어 울긋불긋해졌다.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운동을 계속했다. 등 쪽이라 혼자서 반창고를 붙이긴 어려웠다. 엄마가 보면 맘 아파할까 봐 누나에게 반창고를 갈아달라고 부탁했다.         



 구르는 운동을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났다. 근육이 풀려서 통증은 덜해졌지만 뒤틀린 척추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의자에 앉을 수 없는 것도 여전했다. 운동한 기간이 짧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 운동은 효과가 없는 걸까? 언제쯤이면 상태가 호전되는 걸까? 난 이 운동이 아닌 다른 대안을 알지 못했다. 야생동물은 환경이 바뀌면 스트레스 때문에 죽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육체적 통증은 여전히 괴로웠지만 난 그것에 익숙해졌다. 밥을 먹고 재활운동을 하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강변로를 걸었다. 더러워진 반창고를 교체하고, 누워서 책을 보고, 선 채로 티브이를 봤다. 비정상적인 환경은 일상이 되었다. 긴박했던 마음에 내 상황을 돌이켜볼 수 있는 작은 틈이 생겼다. 



그 틈으로 '억울함'이란 감정이 가득 들어찼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다물 만큼 분했다. 괴로운 일상을 인내하는 와중에 뇌리를 떠나지 않았단 건 '왜 하필 나야?'라는 질문이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내가 이런 병을 앓아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살면서 특별히 원한을 살 만한 일은 저지르지 않았다. 사람을 칼로 찌르거나 금은방을 턴 적도 없다. 이런 불행은 남의 일이어야만 했다. '아침마당'이나 '병원 24시'의 사연이어야 했다.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부조리한 생활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를 괴롭혔던 건 내가 겪는 고통에 뚜렷한 인과관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수용소에 갇혀있었던 정신과 의사가 쓴 책을 읽었다. 구타, 박해, 치욕, 굶주림, 장티푸스, 정신병, 고문, 가스실 등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비참함이 망라돼 있었다. 인류가 생긴 이래로 수많은 이들이 불행을 겪었다. 각자에게 불행은 이치를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것이었다. 불행은 희생양을 선택할 때 노소와 선악과 빈부를 가리지 않았다. 많은 이들에게 불운한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내게도 정체모를 불행이 찾아왔다.



 나는 삶이 순탄하고 평온할 거라 생각했다. 재난, 재앙은 나와 관계없는 것이라 여겼다. 난 뒤바뀌어버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걸 어려워했다. 남들은 진로, 취업 같은 일반적인 문제로 고민할 때 '어떻게 하면 의자에 앉을 수 있을까'같은 어처구니없는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하지만 내가 외면한다고 해서 현실의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몸의 고통은 그림자 같은 것이어서 어느 순간에나 내가 처한 상황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쓰디쓴 현실이 내 것임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삶에는 통제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 운명의 신은 때때로 강한 힘으로 우리가 기존에 삶이라 믿어왔던 것을 산산조각 낸다. 그럴 때 인간은 묻는다.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나입니까? 고통받는 당사자에게 이 질문은 절박한 것이다. 그는 은연중에 불행 이전의 삶을 타고난 권리처럼 여겨왔다. 그는 불행이 소중한 것을 부당하게 강탈했다고 여긴다. '왜 나입니까?'란 질문을 수백 번 자문자답하다 보면 가혹하게 변해버린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평범한 삶에 익숙했던 과거의 사고방식을 험난한 상황에 맞춰 재조정한다. '왜 하필 나야?'라는 질문은 불행한 이의 내면에서 힘을 잃는다. 그 질문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개선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체념하듯 마음을 밀어붙여 진작부터 해야 했던 질문을 떠올린다. '불행이 나의 현실이라면,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불행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으면 두 가지 선택지가 남는다. 주저앉아 삶을 한탄하던가, 이 악물고 앞으로 걸어가던가. 운명이 삶을 타격할 때 쉽게 백기를 드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을 마주했을 때 독기를 품고 투쟁하기를 택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며 삶에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절한 몸으로 어두운 밤길을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쪽을 택했다.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 속을 헤매게 될지 그때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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