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문장의 바다

by 쓰는 사람

애니메이션 '충사(蟲師)'는 벌레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의 벌레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곤충이 아닌 생명과 영혼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다른 형태(異形)의 존재다.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쉽게 알아차릴 수 없지만 분명히 실재하며 생태계 내의 생명체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 만화가 주인공 깅코의 여정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건 인간의 마음과 무의식의 세계다. 벌레들은 인간의 탐욕, 광기, 꿈, 집착, 의존, 애정 등을 상징하며 벌레에 얽혀 있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이들로 볼 수 있다. 유능한 충사 깅코는 벌레와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중재자적인 역할을 한다. 무당, 혹은 떠돌이 정신과 의사 정도로 그의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환자의 문제에 깊게 개입에 영향을 주는 성향의 정신과 의사는 아니다.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환자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해 정확한 조언을 주려는 쪽에 가깝다. 환자의 역량을 넘어선 일을 할 수 없는 치료자의 한계를 깅코는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가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그 또한 막막한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헤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왼쪽 눈썹 아래에는 눈동자 대신 텅 빈 구멍이 과거의 상흔처럼 깊게 패어 있다.



시커먼 오른쪽 다리를 지닌 채 태어난 한 소녀가 있다. 딱딱하게 굳은 먹빛 다리로는 걸을 수 없어 아이는 집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글을 깨치기 시작했을 무렵 소녀는 집사로부터 가문의 옛이야기를 듣는다. 소녀의 일족은 대대로 충사 일을 해왔다. 아득히 먼 옛날 파괴적이고 강력한 벌레가 지상의 생명을 절멸시키려 했을 때, 소녀의 조상은 세상의 파멸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몸에 벌레를 봉인한 다음 온몸이 까맣게 변해 죽고 말았다. 이후로 가문에서는 수 대에 걸쳐 이따금씩 인체 부위 중 한 곳에 먹빛을 띤 아이가 태어났고, 그들은 제 수명을 누리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곤 했다.



두려워하는 소녀에게 집사는 가문 대대로 전해져 오는 벌레에 대응하는 비책을 알려준다. 그 방법은 벌레를 퇴치한 이야기를 듣고 기억해두었다 종이에 기록하는 것. 벌레를 물리친 이야기는 그 자체로 몸안에 있는 벌레에게 위협이 되기에, 벌레 이야기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체내의 벌레를 외부로 배출해 종이에 봉인하는 게 가능했다. 충사였던 집사는 소녀에게 수많은 벌레의 일화를 들려준다. 후에 이야깃거리가 바닥난 집사는 다른 충사들을 초청해 소녀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글 쓰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붓으로 글자를 써내려 가다 보면 검은 다리에서 격통이 올라왔다. 종이에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힘겨운 작업이었다. 글을 쓰고 나면 지쳐서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써야 할 벌레 이야기는 한없이 많았다. 소녀는 인적이 드문 장소에 있는 집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글만 썼다. 검은 다리 속 벌레의 마(魔)는 워낙 응축돼 있어 쉽사리 몰아낼 수 없었다. 왜 나만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 거지? 같은 생각에 엉엉 울기도 했다.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고픈 욕망, 자신이 살아있을 때 벌레를 모두 봉인해내지 못하면 벌레의 저주가 후손에게까지 이어진다는 냉혹한 현실, 소녀의 몸에는 벌레와 함께 벌레를 몰아낼 수 있는 힘도 함께 있다는 집사의 격려는 그녀가 계속 글을 쓸 수 있도록 등을 떠밀었다.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벌레를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음에도 글로 봉인한 벌레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바로 글쓰기 치료의 힘이다. 벌레는 과거의 어두운 경험이다. 정돈되지 않은 어두운 과거는 당사자의 현재에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 벌레로 잠식돼 검게 변색된 다리로는 자유롭게 걸을 수 없다. 걸을 수 없다는 건 타인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뜻이다. 가문 내에 검은 신체를 가진 아이가 다시 태어날 있다는 사실은 부모 내면의 어둠이 자손에게 대물림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글쓰기는 내면의 벌레를 몸 밖으로 몰아낼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이 우리를 괴롭히는 건 그것이 어둠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어둠의 기억에서 해방되려면 그 기억을 밝은 곳으로 끌어내 마주해야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회피하려 한다. 가슴 아픈 일은 되도록 건드리려 하지 않고 뼈아픈 현실에선 눈을 돌린다. 하지만 고통을 묻어두려는 태도가 오히려 고통을 장기화하고 고착화시킨다. 이것은 칼로 째고 고름을 짜서 소독해야 할 부위를 수술이 무서워 방치하는 것과 같다.


글쓰기는 회피하고픈 기억과 대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묻어둔 마음의 진실은 외면할 수 있다. 하지만 활자의 형태로 눈앞에 드러난 진실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글쓰기는 진실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내딛을 수 있도록 돕는다. 문자의 발명과 문명의 진보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문자는 생각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다듬어 현실화시킨다. 생각은 문자를 딛고 앞으로 나아간다.



부정적인 경험이 우리를 뒤흔들 수 있는 건 그것이 정리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과 공포, 증오, 콤플렉스, 착각, 상상, 고통이 복잡한 덩굴처럼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기억에 다가서는 일조차 겁이 난다. 글쓰기 치료는 엉킨 기억과 생각과 감정들을 질서 정연하게 배열한다.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던 경험의 쓰레기장이 자기만의 이야기로 정리된다. 이야기가 유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야기에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과거의 한 시기를 매듭짓고 앞으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우리 집엔 1990년대 중반에 생산된 노트북이 있었다. 보험회사에 다녔던 엄마가 쓸 일이 없어 몇 년간 방치해둔 것이었다. 3킬로는 족히 나가는 쇳덩이 같은 노트북은 전원을 켜면 중국집 환풍기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다. 고물이 돼버린 노트북이 제대로 실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곤 윈도우즈 메모장과 지뢰찾기밖에 없었다. 구식 노트북은 할 수 있는 게 얼마 없게 돼버린 내 처지와 비슷했다. 마음을 치료하고자 마음먹은 후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솔직하게 적었다. 난 할 수 있는 한 스스로에게 진실해지려 노력했다. 평생 진실을 피해 도망다녔는데, 이제 이렇게 막판까지 왔는데, 더 이상 나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내게는 정말 이것밖에 없었다. 나는 스스로의 정신과 의사가 되어야 했다. 난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성실한 태도로 답변하려 애썼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건 27년 넘게 살아오면서 내가 자신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나에 대해 무지했다. 난 오랫동안 던져야 할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대답해야 할 질문을 교묘하게 회피하며 살아왔다.


마음에 떠다니는 온갖 것들을 메모장에 적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기억에 대해 적었다. 주로 가정, 학창 시절과 군대에서 겪었던 일들이었다. 맞거나, 모욕당하거나, 비굴하게 굴복하거나, 소외되거나, 웃음거리가 되거나, 두려움에 떨거나 무시당한 일들이었다. 적히는 내용들에는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 그 공간은 안전했으니까. 어떠한 말을 써도 괜찮았으니까. 평가당하거나, 폄훼당하거나, 욕먹을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이십 분, 삼십 분을 내리 욕만 써내려 갈 때도 있었다. 개새끼며 씨발놈이며 하는 욕과 끔찍한 복수의 이야기를 두 페이지, 세 페이지 써 내려갈 때도 있었다. 차마 발설할 수 없는 수치스럽고 비논리적인 이야기들이 노트북 화면을 가득 채웠다.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려도 써야 할 이야기는 바닥나지 않았다. 내 몸은 더러운 감정과 기억으로 가득 채워진 거대한 폐기물 드럼통 같았다. 나는 평생 동안 내 안에 있는 무서운 것, 더러운 것, 부정적인 것들을 외면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적고 적어도 내 안에는 토해내야 할 쓰레기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기억이란 참 잔인한 것이다. 잊고 싶고 뇌리에서 지우고 싶은 일일수록 강하고 깊게 각인된다. 난 이 수치스러운 일들을 지워버리고 싶어 했지만 이 사건들은 수년이 지나도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과거의 기억은 불쑥불쑥 떠올라 현재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과거의 기억을 적는 일은 내키지 않는 작업이었다. 희미해진 지난날을 헤집어 어두운 기억을 떠올릴 때면 그때의 고통과 모욕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마치 그때로 되돌아간 것처럼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당시의 수치심, 모멸감, 치욕, 증오, 억울함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손이 덜덜 떨리고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나는 고고학자가 깨진 유적을 복원하듯이 산산이 부서진 기억의 조각을 하나하나 이어 붙였다. 특정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기간이면 한동안은 복수심과 치욕감이 일상을 지배했다. 굳이 지나간 일을 들춰내 현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돌이켜보면 모두 반드시 필요했던 과정이었다. 감염을 막기 위해 불로 지지고 상처를 꿰매는 과정은 본디 고통스러운 법이니까. 나는 내 속의 검고 끈적이는 액체를 밖으로 퍼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일찍이 치렀어야 할 대가를 이제서야 지불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미뤄뒀던 공부를 하는 수험생처럼 밀쳐두었던 과거의 사건들을 하나하나 직면해 나갔다. 숨이 턱턱 막히던 여름이 지나고, 으깨진 은행이 길가에 널려 있던 가을도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었다.



*이번 글의 제목은 충사의 에피소드 제목과 동일합니다.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피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신영복의 <강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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