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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May 01. 2020

가난하지만 불안하지 않은

서른다섯해동안 살았지만 독립해서 혼자 살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집을 나가 혼자 힘으로 먹고 살아보겠다는 나이먹은 아들에게 엄마는 전세금 삼천을 지원해주었다. 지난 이십오년동안 보험을 하며 생계를 꾸려온 엄마에게 이 돈은 ‘피같은 돈’이 아니라  '피' 그 자체일 것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 10여분간 걸어 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높다란 시멘트 담벼락 위에 피어난 장미꽃 몇송이를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로즈힐(Rose hill)'인 이유이다. 삼십분마다 마을 버스 한 대가 다니고 세탁소, 슈퍼, 치킨집등이 들어선 작은 상가가 있는 단출한 아파트 단지다.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아파트의 무덤덤한 표정은 ‘나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 마세요’라고말하는 듯 하다.    


왕복 세시간 거리의 이삿길을 아버지의 승용차로 두어번 오가며 짐을 날랐다. 이사 비용을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냄비와 옷가지와 책을 넣은 박스를 빈 공간 없이 빼곡이 차에 실었다. 기다란 책장을 싣기 위해 뒷자석을 모두 눕혔다. 책장이 조수석의 내뒤통수까지 닿았고 내 발 아래에도 짐을 실어 내내 웅크린 가부좌 자세로 있어야 했다. 부모님은 차를 타고 가며 내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려 애썼다. 아버지는 '내 돈은 내돈, 남의 돈도 내 돈'이라는 혁신적인 말씀을 해주었고 엄마는 내가 끼니를 거를까봐 걱정했다. 나를 걱정하며 나이먹어가는 그들이 안쓰러웠다. 아버지는 이삿짐과 나를 집으로 옮겨 놓은 뒤 십만원을 쥐어주곤 말없이 왔던길로 돌아가셨다.    


이사와서 처음으로 한 일은 아침저녁으로 가축들에게 먹이를 챙겨주는 일이었다. 내가 가축을 돌보기 시작할 즈음에는 닭들에게 발효사료를 처음으로 먹이고 있었다. 발효사료는 부엽토, 왕겨, 깻묵, 콩비지와 물을 적정비율로 섞은뒤 발효시켜 만든다. 부엽토에 있는 균이 빵의 효모처럼 재료를 발효시켜 영양만점의 사료를 만든다. 처음만든 발효사료에는 톱밥을 지나치게 많이 넣었던 것 같다. 기름진 닭사료를 먹다가 갑자기 나무가루를 먹게된 닭들은 굶주린 죄수들처럼 난폭해졌다. 먹이를 주러 닭장근처로 가면 내가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열렬한 신도들처럼 따라왔다. 사이비 계(鷄닭 계)교의 교주가 된 기분이었다. 사료통에 모이를 부어주면 고개를 박고 정신없이 쪼아먹었다. 


얼마후엔 산양에게서 젖을 짜야 했다. 산양 이야기를 하려니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산양을 처음 본 사람들은 '어머~귀여워' 하고 반응하지만 난 녀석들의 실체를 알고 있다. 이 녀석들은 오냐오냐 하며 과잉보호받고 자란 초등 2학년생 같다. 밥주러 가면 매애~ 하고 우는데, 그 울음에 담긴 뜻은, 의역하자면 '나를 배고프게 두다니, 이 맹꽁이 같은 녀석!' 이다. 먹이통을 뒤엎는데, 땅에 떨어진 사료는 먹지 않는다. 아무대나 오줌똥을 싸면서 분비물이 조금이라도 묻은 사료는 입에 대지 않는다. 그래도 배고프면 먹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겠지만 허기져도 더러운 사료는 먹지 않는다. 심지어 아침에 줬던 사료가 저녁까지 남아있으면 무척 깨끗한 상태임에도 먹지 않는다. 밥솥에 남은 3일지난 밥도 먹는 나로서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고 마는 부분이다.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는 달라이 라마라 해도 산양앞에선 분노하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깨끗이 빨래한 청바지로 갈아 입고 산양우리로 들어갔는데 아기산양이 귀여운척하면서 내 다리에 올라탔다. 새옷에 똥이 묻은 나는 충격을 받아 한참동안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언젠가 산양유를 배달하고 오토바이로 한적한 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맞바람을 맞으며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벅찼다. 태어나 처음으로 인생의 형태를 내 손으로 빚어보고 있었다. 몇년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인생을 움켜쥐고 있단 실감이 났다. 스스로의 생각대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게 이처럼 뿌듯한 일이란 걸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소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이들이라면 코웃음칠 정도의 돈밖에 벌지 못했지만 생활은 궁핍하지 않았다. 녹색평론 김종철 편집장의 말처럼 가난과 빈곤은 구분되어야 할 것이므로. 나는 분명 가난하지만 빈곤하진 않았고 더 이상 예전처럼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내가 왜 항상 불안해하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건 내가 미래를 걱정하고 대비하는데 현재를 모두 소진해왔기 때문이다. 미래를 염려했기에 '안정'이란 단어에 집착했고 사람들이 안정이라 믿는 것들을 획득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어쩌면 '안정'이란 두려운 사람들이 성급하게 정답이라고 결론내린 집단적 미신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곳에서 내가 겪은 모든 일이 마음에 들고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다. 산양이 유난히 날뛰는 날이면 속에서 열불이 났고, 땡볕에서 허리숙이고 잡초를 뽑다보면 ‘내가 지금 뭘하고 있나’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조건이 구비된 완벽한 삶은 삼류소설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몇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분명했던 건 내가 현재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젖을 짜고 배달을 해야 했다. 감자를 심고 물을 주고 진딧물을 없애야 했다. 때로는 동료들과 대립하며 의견을 조율했다. 일상의 노동과 몸의 피로와 함께 먹는 점심과 밭에서 나누는 농담과 낮잠과 햇살과 오토바이의 진동이 내가 살아있고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불안하지 않게된 건 그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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